화 잘 내는 직원이 일을 잘한다고요?   

2024. 3. 1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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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경영일기를 쓰지 않아서 그간 (별일 없으면) 매일 해오던 ‘하루 1편 논문 읽기’를 등한시했습니다. 시즌 2를 시작하면서 밀린 논문을 하나씩 읽고 있는데, 오늘 재미난 논문을 발견했습니다. 이 논문의 주제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화를 내라. 그러면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된다!” 

 

‘무슨 소리지?’ 저는 어그로를 끌기 위해서 일부러 이런 제목으로 논문을 쓴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습니다. 연구자들도 학술지 에디터들의 눈에 들기 위해 논문 제목 정하기에 심혈을 기울인다고 하니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분노’를 부정적인 감정으로 생각합니다. 화를 내면 집중력이 흐트러져서 10개 할 것을 2~3개 밖에 못한다고 짐작하죠. 그래서 명상이나 운동을 통해 분노를 가라앉히라는 조언을 하라고 합니다. 그러니 처음 논문의 제목을 보고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논문의 본문을 읽어 보니 실험을 통해 입증된 주장이더군요.

 

 

연구자는 1,000명의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모욕적인 이미지를 보여주거나 짜증스러운 컴퓨터 과제를 처리하게 해서 일부러 분노를 유발시켰습니다. 그런 다음, 까다로운 철자법 풀기나 어려운 게임 등 달성해야 할 목표가 분명한 작업을 수행하게 했죠. 그랬더니만, 분노를 ‘유발 당한’ 그룹의 참가자들이 그렇지 않은 참가자들에 비해 작업 성과가 더 높았습니다. 더 많은 문제를 풀었고, 더 많이 견디는 경향을 보였던 것이죠. 그리고 이렇게 분노가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되는 효과는 쉬운 과제보다 어려운 과제를 부여 받았을 때 발생한다는 것이 추가 실험으로 밝혀졌습니다.

 

자, 이 논문의 시사점이 무엇일까요? 어려운 과제를 해결하려면 일부러라도 화를 내야 할까요? 주변 동료들을 손가락질 하며 욕해야 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분노는 타인에게 직접적으로 가하는 폭력적인 분노는 아닙니다. ‘일의 어려움으로 인한 짜증과 고통’을 의미하죠. 이런 류의 분노가 행동의 동기를 더욱 강화한다는 게 진정한 시사점입니다.

 

물론 분노가 부정적인 결과를 양산한다는 증거도 많이 있습니다만, 목표 달성 과정에서 본인이 가로막혀 있어서 발생하는 분노는 긍정적인 현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좀더 잘하고 싶고, 좀더 많이 하고 싶으며, 좀더 먼저 하고 싶은 의지가 있기에 분노가 생기는 것이니까요. 그러고 싶지 않은 사람은 애초에 분노가 생기지 않을 겁니다. 그냥 포기하고 말지. 그러니 짜증스럽고 답답한 감정이 솟아오르면 잠시 자신을 객관화해서 ‘나는 왜 분노하는가?’를 분석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목표를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볼 기회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 더 덧붙이자면, 관리자는 직원들이 일을 하다가 분노를 터뜨리는 모습을 이상하게 보지는 말아야겠죠. 그 분노가 물리적으로 타인을 향하지 않는 한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본인이 무엇을 어떻게 지원해야 할지 생각해야 할 겁니다. 마냥 즐거워 하는 직원이 일 잘하는 직원은 아니라는 걸 잘 알지 않습니까?   (끝)

 

*참고논문

Lench, H. C., Reed, N. T., George, T., Kaiser, K. A., & North, S. G. (2023). Anger has benefits for attaining goals.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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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날 얼마나 좋아할까' 궁금한가요?   

2024. 3. 1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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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모임에 처음 참석하거나 새로운 회사에 처음 출근하는 날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긴장하기 마련입니다. 낯설고 새롭다는 것 자체가 주는 긍정적 의미의 스트레스일 수 있지만, 그 긴장이 과해지면 부정적 스트레스가 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 사람들은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야’라는 추측인데, 이 추측은 근거가 없음에도 누군가를 처음 대면하는 상황에서 꼭 등장합니다. 저의 경우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사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추측과 달리 ‘대개는 당신을 좋아합니다’. 여러분은 ‘이 사람들은 날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야.’라고 추측하지만, 그 사람들에게 따로 물어보면 ‘좋은 사람 같아요. 마음에 들어요’라고 말하는 경우가 예상보다 많습니다. 이 차이를 ‘호감도 차이(Liking Gap)’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타인이 날 좋아할 거라고 내가 추측하는 정도’과 ‘실제로 타인이 나를 좋아하는 정도’ 간의 차이가 바로 ‘호감도 차이’죠.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일반적으로(아주 특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실제로 호감도 차이는 얼마 안 되거나, ‘타인이 나를 좋아하는 정도’가 더 크다고 합니다. 그러니, 어려운 자리에 처음 들어선다고 해서 ‘이 사람들은 날 좋아하지 않을 테니 조심해야 해’라고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죠. 자신의 호감도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모임에 참석하거나, 타인들과 새로 어울려야 할 때 이를 떠올리면 마음이 조금 놓이지 않을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호감도 차이가 새로운 만남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기존의 멤버들 사이에도 존재한다고 해요. 서로가 서로에게 ‘저 친구는 날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야’란 생각을 품고 있다는 것이죠. 실제로는 그다지 싫어하지 않거나 반대로 좋아하는 데도 말이에요. 호감도 차이가 어느 정도 존재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팀 내에서 호감도 차이가 크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협조를 구하는 걸 어려워 한다는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저 친구는 날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야’란 추측이 강하니까 ‘내가 도와달라고 하면 날 더 싫어하겠지?’라고 지레 겁을 먹고는 꿀먹은 벙어리처럼 도와달란 말을 못하죠. 또 ‘저 친구에게 이런 조언을 해 주고 싶어’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조언했다가 무슨 욕을 얻어 먹으려고.’하며 포기하기 때문에 동료 간의 피드백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문제를 함께 해결하려고 하기보다 ‘그냥 내가 혼자 하고 말지’라는 생각에 팀원들 간의 시너지도 발생하지 못하죠.

 

앞에서 말했듯이, 실제로 타인은 ‘내 생각보다 나를 마음에 들어 합니다’. 적어도 나를 싫어할 가능성은 내 생각보다는 낮습니다.’ 아니면 호불호 자체가 없을 수도 있죠. 물론 일반적으로는 그렇다는 겁니다. 어디에나 밉고 싫은 사람이 있지만요. 타인과 충분한 상호작용을 하기 전에 자신의 호감도를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게 겸손은 아닙니다. ‘남이 날 좋아할까 말까’란 감정보다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진정한 겸손이죠.  (끝)

 

*참고논문

Mastroianni, A. M., Cooney, G., Boothby, E. J., & Reece, A. G. (2021). The liking gap in groups and teams. Organizational Behavior and Human Decision Processes, 162, 109-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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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인데 휴가 보낼 수 있나요?   

2024. 3. 1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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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TV플러스에서 상영 중인 <마스터스 오브 디 에어(Masters Of The Air)>라는 시리즈물을 시청한 적이 있나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공군의 활약과 고난을 다룬 전쟁 드라마인데, 지난번에 잠깐 언급했듯이 이런 전쟁물은 저에게 경영과 리더십에 관한 여러 가지 시사점을 던져 줍니다. 특히 이 시리즈의 8부에서 다룬 에피소드가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제가 받은 인상을 설명하려면 약간의 스포일러가 필요하니 양해 바랍니다.

 

주인공 중 하나인 크로즈비는 공군 대위로서 ‘항법사’라는 직무를 맡고 있습니다. 원래는 폭격기 안에 다른 장병과 함께 탑승해서 실시간으로 비행기 운행 방향을 계산하고 결정하는 보직을 맡고 있었지만, 운 좋게도 대대 항법사로 보직을 옮겨 대대 작전본부에서 비행단 전체의 비행 및 폭격 계획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운 좋게도’라고 말한 까닭은 크로즈비 대신 폭격기에 오른 동료 항법사는 적의 공격으로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지상 임무에 매진하던 그는 ‘디 데이’를 위한 항로 계획에 참여합니다. 디 데이란 바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입니다. 엄청난 병력과 물자, 엄청난 수의 비행기 등이 한꺼번에 움직여야 하는 대규모 작전이었기에 그는 밤을 새워 작전계획에 매진합니다. 무려 72시간 동안 한숨도 자지 않은 상태로 말입니다. 벌건 눈으로 자기 앞에 쌓이는 항로 계획 명령을 수행하는 그에게 군의관과 동료들이 ‘가서 좀 자라’고 충고하지만, 그는 ‘괜찮다. 아무렇지도 않다. 할일이 남았다’라고 대꾸합니다. 하지만 의지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몸이 받쳐줄 수 있겠습니까? 결국 그는 ‘아냐, 난 괜찮다’라고 말하고 나서 바로 바닥에 쓰러져 버립니다. 기절한 것이죠.

 

 

그는 토요일 아침 7시 30분경에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알고보니 3일이나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실행 과정을 전부 놓치고 만 겁니다. 그는 꽤 실망합니다. 일을 다 해놓고 그게 실현되는 걸 보지 못했으니 그럴 만 했죠. 

 

그 다음이 아주 인상적인 대목이었습니다. 며칠 후 대대장은 그를 불러 휴가를 가라고 말합니다. “자네는 그동안 많은 걸 잘 해냈어. 전부 감당해 냈어.”라고 칭찬하며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한 달 간 좀 쉬어.” 한창 유럽 본토에서 독일군과 맹렬히 싸우는 마당에 본국에 가서 1개월을 쉬라니?? 크로즈비는 휴가를 안 가겠다는 취지로 반발하자 대대장은 그의 말을 끊고 “우리에게는 멀쩡한 자네가 필요해. 자넨 우리에게 너무 중요하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완강한 대대장의 말에 크로즈비는 휴가 명령을 수용했습니다. 마음 속으로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이 시리즈는 픽션이긴 하지만 실제 이야기를 많이 참조했다고 하니 크로즈비의 일화가 지어낸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설령 지어냈다고 해도, 인재를 관리하는 그들만의 독특한 방식이 드러난 에피소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인력은 부족한데 할일은 많고 게다가 언제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르는, 전쟁 같은 상황에서 ‘일 잘하면서 충성도 높은’ 인재에게 한 달씩이나 휴가를 줄 수 있겠습니까? 휴가 보내는 이유가 “자네가 중요하기 때문이야.”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에게도 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입니다. 그 인재를 대체할 만한 인력이 없을 때 더 그렇겠죠.

 

우리 문화에는 장시간 근무와 과로를 미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걸 자청하는 직원을 (안쓰러워 하면서도) 칭찬하곤 하죠. 혹은 그렇게 오랜 시간 쉬지 않고 일하기를 은근 기대하기도 합니다. 설령 휴식을 주더라도 한 달씩은 주지 못하겠죠. 길어야 3~4일? 그것도 토요일 일요일 붙여서? 

 

무조건적이고 충성스러운 열정이 얼마나 자기소모적인지를, 그래서 좋은 인재는 어떻게 아껴서 써야 하는지를, 그리고 장기적인 성과를 창출하려면 인재를 혹사시키면 안 된다는 것 등을 느끼게 한, <마스터스 오브 디 에어>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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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의 '뽕을 뽑는' 방법   

2024. 3. 11.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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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같은 OTT 사이트에 들어가면 영상 컨텐츠를 즐기는 시간보다 어떤 걸 시청할지 고르는 시간이 더 길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걸 보자니 내 취향이 아니고, 저걸 보자니 시리즈물이라 자칫 밤을 새며 볼까 두렵고, 또 누군가가 추천한 그걸 보자니 주관없는 따라쟁이가 된 것 같고…. 마우스는 연신 스크롤을 해대고 클릭을 하지만, 보고싶은 컨텐츠가 눈에 들어오지 않죠. 반찬은 많은데 어디에 젓가락을 가져갈지 모르겠는, 그렇고 그런 한정식집처럼 말이죠. 결국 아무것도 고르지 못해서 유튜브로 옮겨 가서 5~10분 정도로 요약한 동영상을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도 그러지 않는지요?

 

돈 주고 보는 OTT인데 이래야 되겠냐 싶어서 컨텐츠를 골라서 보는 몇 가지 방법을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체’에 걸리는 컨텐츠는 웬만하면 ‘그냥 보자’라고 결정하니 OTT 사이트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시간이 대폭 줄어들더군요. 노하우까지는 아니지만, 제가 만든 4가지 원칙(?)을 공유해 봅니다.

 

 

1원칙: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는 무조건 본다.

2원칙: 흥행한 영화이지만 영화관에서 챙겨보지 못한 것은 무조건 본다.

3원칙: 1, 2차 세계대전에 관한 영화나 다큐는 무조건 본다.

4원칙: ‘스페이스 오딧세이’ SF 영화는 무조건 본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원칙은 그러려니 할 텐데, 세 번째 원칙을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전쟁을 숭앙하고 찬양하기 때문은 절대 아닙니다. 잠재의식에 폭력 선호 성향이 자리잡고 있어서도 아닙니다(물론 저도 종종 '욱;하기는 합니다만...). 저는 전쟁 영화에서 경영에 관해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다고 보거든요. 지휘관의 리더십은 물론이고, 극한 상황에 처한 병사들의 심리, 그리고 각자의 생존을 추구하는 인간 본성 등을 엿보는 데 매우 좋은 교과서이기 때문이죠. 

 

네 번째 원칙이 ‘스페이스 오딧세이 SF 영화는 무조건 본다’에는 우주를 향한 깊은 동경이 반영된 것입니다. 좀더 명확히 하자면, 제가 좋아하는 SF 영화는 실제로 있을 법한(물리법칙을 위배하지 않는) 스토리로 구성된 것이어야 하죠. <인터스텔라>나 <미드나잇 스카이>가 그런 류의 영화입니다. <어벤져스>나 <닥터 스트레인지> 같은 판타지 SF는 제가 좋아하는 SF 장르가 아닙니다.

 

물론 이렇게 네 가지 원칙을 가지고 ‘체’를 쳐도 아무것도 남지 않고 모두 빠져나가 버리는 경우가 있지만, 그래서 ‘에이, 그냥 유튜브나 보자’ 싶을 때가 있긴 하지만, 예전보다는 OTT에 내는 요금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컨텐츠를 즐기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뽕을 뽑고’ 있습니다.

 

정보가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문제인 요즘, 이렇게 자신만의 원칙을 만들어서 선택의 시간과 경로를 단축시켜 보세요. 만약 체 눈이 너무 커서 숭숭 빠져나간다면(원칙 적용해도 볼 컨텐츠가 없다면) 새로운 원칙 포트폴리오로 새 체를 마련하면 됩니다.그게 OTT이든 책이든 공연이든, 컨텐츠가 너무 많아서 ‘이것도 봐야겠고 저것도 봐야겠고’ 해서 정작 아무것도 보지 않기로 결정하는 일을 줄일 수 있을 겁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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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접착제)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   

2024. 3. 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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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저는 워크맨, 데크와 소형 음향기기 수리를 취미로 하고 있습니다. 열 번을 고치면 6~7번 가량은 스스로 어깨를 으쓱할 만큼 좋은 결과가 나오지만, 워낙 제 수리 실력이 근본 없이 여기저기에서 주어 들은 것으로 이뤄졌기에 도중에 중단하거나 아예 망가뜨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실패는 학습의 왕도라지 않습니까? 저에게는 아주 뼈아픈 실수로 새삼 깨달은 바를 이야기하겠습니다.

 

Braun이라는 브랜드를 말하면 대부분 면도기를 떠올리지만, 한때는 오디오 업계의 한 축을 담당할 정도로 네임 밸류가 있던 기업입니다. 특히 유명 산업 디자이너인 디터 람스의 디자인으로 알려진 곳이죠. 과거 애플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조너선 아이브가 디터 람스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었다는 것을 들어본 적 있을 겁니다. 저는 Braun의 앰프와 카세트 데크, 라디오 등을 가지고 있는데, 저에게 마음대로 쓸 돈이 충분하다면 집 안 가득콜렉팅하고 싶을 만큼 수집욕을 자극하는 브랜드입니다.

 

워낙 오래된 제품(50년대 ~70년대)이라 여기저기에 병을 달고 있을 수밖에 없는데, 어느날 무슨 ‘만용’이 솟구쳤는지 선반 위에 놓인 앰프를 손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앰프는 나름 괜찮은 소리를 내주었는데 차츰 좌우 볼륨의 차이가 크게 벌어졌습니다. 오른쪽에서 소리가 나긴 하는데, 왼쪽에 비하면 음량이 50%도 안 됐습니다. 게다가 이 앰프에는 입력 소스를 선택하는 버튼이 제대로 눌러지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습니다. 버튼을 누르면 눌린 채로 고정되지 않고 다시 빠져나오는 통에 애를 먹었습니다. 아주 살살 누르면서 속으로 ‘제발 고정돼 다오’라고 간절한 마음을 실어야 겨우 고정됐습니다.

 

그간 워크맨 같은 소형 기기만을 고치다가 무게가 20kg가 넘는 앰프를 분해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크기가 커서 각 부품의 위치와 상태가 눈에 잘 띄였습니다. 버튼이 제대로 눌리지 않는 이유는 고정에 쓰이는 스프링과 걸쇠 등에 먼지와 기름때가 많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죠. 먼지라도 닦아야겠다고 했다가 우연히 발견한 해결책이었습니다. 알콜을 열심히 뿌려가며 깨끗이 닦아내니 눌러도 잘 고정되지 않았던 버튼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잘 고정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때는 정말 ‘나는 천재로구나!’라고 자찬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때 저는 앰프의 뚜껑을 닫아야 했습니다. 눈에 무엇이 씌였는지 ‘왜 이 버튼 캡에는 유격이 있지? 캡과 버튼 사이에 유격이 없도록 하면 더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말았습니다. 뭔가 느슨해진 거라고 판단했던 것이죠. 저는 순간접착제를 써서 약간씩 흔들리는 버튼 캡을 고정시켜 버렸습니다. 정말 그러면 안 됐는데도!

 

순간접착제가 다 굳은 걸 확인하고 앰프 뚜껑을 닫아 전원을 연결하니, 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는 겁니다. ‘왜 이러지? 손보기 전에도 소리는 나왔는데? 소리 출력 쪽은 만진 적도 없는데?’ 그때 쾅~하고 뇌리에 뭔가가 내리꽂혔습니다. ‘버튼 캡의 유격에 의미가 있는 것이구나!’ 그건 유격이 아니라 어떤 버튼이 선택됐는지, 선택되지 않았는지를 알려주기 위한 ‘공간’이었던 겁니다. 옛날 기기들이 디지털 기기가 아니라 아날로그 기기임을 망각한 탓이었죠.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저는 순간접착제로 굳어버린 버튼 캡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하지만 워낙 단단하게 붙어서 전혀 떨어지지 않았죠. 칼을 사용해도, 바늘을 써도, 아세톤을 뿌려봐도 한번 붙어버린 버튼 캡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 나는 천치로구나!’ 저는 제 머리를 여러 번 쥐어박으며 자학했습니다. (구하려면 구할 수는 있지만) 아끼는 앰프를 망가뜨리고 말았다는 감정은 좌절에 가까웠죠. 저는 결국 버튼의 캡을 제거하기로 했습니다. 강력하게 붙어있는 탓에 니퍼와 ‘뻰치’를 써서 뽀개는 방법밖에는 없었죠. 디터 람스 옹에게 뭔가 죄를 짓는 듯한 심정으로 버튼 캡을 뜯어내는 제거하고 나니까 그제서야 앰프는 손보기 전의 소리를 들려주었습니다. 하지만 버튼 캡들이 다 빠져버려 앙상해진 앰프의 소리는 왠지 처량했습니다. 

 

순간접착제를 한번 쓰면 직전의 상태로 되돌리기기 어렵습니다. 직전 상태로 되돌리려면 무언가를 망가뜨릴 수밖에 없죠. 저는 순간접착제를 바르기 전에 이렇게 질문했어야 했습니다. ‘이걸 발라서 붙이면 예전으로 되돌릴 수 없는데 그래도 괜찮은가?’라고. 이 질문의 답은 ‘아니오’가 분명했지만, 멍청하게도 저는 이런 질문을 던질 생각조차 하지 않았죠.

 

결정에는 2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순간접착제로 붙이기와 같은 ‘되돌릴 수 없는 결정’이 있고, 원래의 상태로 ‘되돌릴 수 있는 결정’이 있죠. 두 결정 중 무엇이 더 나은 결정이냐를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처한 상황에 따라 둘 중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느냐가 중요하니까요. 버튼 캡의 유격을 순간접착제로 붙이자는 결정(되돌릴 수 없는 결정)은 그 유격의 용도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해서는 안 될 나쁜 결정’이었습니다. 

 

만약 제가 ‘순간접착제를 쓰는 건 되돌릴 수 없는 결정이야. 되돌릴 수 있는 결정은 없을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었다면, 순간접착제가 아니라 쉽게 뗐다 붙였다 할 수 있는 테이프로 버튼 캡을 고정시켜 보자고 결정했을 겁니다. 그렇게 하고나서 앰프 소리가 나지 않는 현상이 발생하면 ‘아, 이 유격은 없애면 안 되는 것이구나’라고 깨달으며 테이프를 제거했을 테죠.

 

되돌릴 수 있는 결정과 되돌릴 수 없는 결정, 무엇이 더 나은 결정인지는 말할 수 없지만, 살아가면서 가능하면 되돌릴 수 있는 결정을 되돌릴 수 없는 결정보다 자주 해야겠다는 게 뼈아픈 실패로부터 얻은 메시지입니다. 조직 운영을 하며 전략이나 내부 제도 등을 결정할 때, 개인이 자기 삶에 중요한 무언가를 결정할 때 ‘이 결정은 되돌릴 수 없는 결정이 아닌지, 혹시 되돌릴 수 있는 결정이 존재하는지’ 살펴볼 일입니다. 그 결정의 파급효과가 크다면 꼭 그래야 합니다. 옛 금성사의 광고카피처럼, 순간(접착제)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하니까요!  (끝)

 

P.S. 저는 요즘 그 캡을 구하려고 이베이를 샅샅이 뒤지고 있습니다. 되돌릴 수 없는 결정의 후유증이 참 크네요, (3D 프린팅을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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