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운터 펀치보다는 잽을 날려라   

2011. 12. 30.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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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물은 진화합니다. 생존을 위해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진화의 매커니즘은 생태계의 '보이지 않는 손'입니다. 진화의 힘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 힘의 위력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진화의 속도가 느리기 때문입니다. 아니, 진화의 속도가 느리다기보다는 우리 인간이 그 과정을 지켜보기에는 수명이 짧기 때문이겠죠.

인간과 같은 고등동물(사실 이 용어는 부적절하지만...)들의 진화 과정은 인내심을 가지고 세대와 세대를 거쳐 오랜 기간 관찰해야만 하지만, 박테리아와 같은 생물들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면 동적으로 진화가 일어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습니다. 인간에 비해 한 세대의 기간이 매우 짧기 때문이죠. 거피(Guppy)라고 불리는 작은 물고기도 진화의 양상을 관찰하기에 좋은 생물입니다.



거피는 몸 길이가 암컷이 약 6cm, 수컷이 약 3cm 정도 되는 작은 물고기인데, 수컷의 경우 몸에 화려한 무늬가 많고 색채 또한 다양하여 관상용으로 많이 사육되는 물고기입니다. 하지만 화려한 몸은 포식자 물고기의 눈에 자주 띄기 때문에 생존에 불리한 요소입니다. 존 엔들러(John Endler)라는 생물학자는 '선택압'을 가하면 거피의 화려한 무늬가 어떻게 변할지 알고 싶었습니다.

엔들러는 18곳에서 거피를 채취하여 자신이 만든 온실 내의 인공 연못으로 옮겨 6개월 동안 키웠습니다. 6개월이란 기간은 거피에게 상당히 긴 시간이라서 그 시간 동안 나이 든 개체는 죽고 다시 새로운 개체가 태어나면서 여러 세대를 거치게 되었죠. 엔들러는 이렇게 사육한 거피들을 각각 격리된 10개의 연못으로 분리시켰습니다. 그런 다음, 그 중 4개의 연못에는 시클리드(Cichlid)라 불리는 포식자 한 마리를 넣어 거피와 함께 살도록 했고, 다른 4개의 연못에는 리블루스(Rivulus)라 불리는 물고기 여섯 마리를 함께 넣었죠. 리불루스는 부유물을 먹고 살기 때문에 거피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물고기입니다. 나머지 2개의 연못은 통제군으로서 거피들만 살도록 했습니다.

엔들러는 6개월, 11개월, 20개월 시점에 각 연못에서 수컷 거피들을 추출하여 몸에 있는 점의 숫자를 세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시클리드(포식자 물고기)와 같이 자란 거피들의 점의 개수가 점점 줄어드는 패턴이 발견되었습니다. 반면, 리불루스와 함께 자란 거피들과 자기네끼리 자란 거피들의 몸에서는 점의 개수가 오히려 증가했습니다. 시클리드 한 마리의 존재로 인해 20개월 동안 몸의 점이 점점 사라지는 진화의 과정이 포착된 것입니다.

엔들러는 인공적인 조건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을지 모른다고 의심하고, 야생에서 사는 거피들을 관찰해보기로 했습니다. 결과는 위의 인공적인 실험과 같았습니다. 엔들러는 시클리드와 같이 살던 거피 100여 마리를 리불루스만 서식하는 냇물로 옮겨 봤습니다. 2년이 지나고 그 냇물로 다시 찾아간 엔들러는 거피 몸에 점의 개수가 평균 10개에서 13개 정도로 증가된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점의 개수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몸의 색깔이 화려해진 현상도 발견했죠.

진화 프로세스가 거피로 하여금 화려한 몸으로 암컷을 유혹하여 얻는 유전적 이득과 그로 인해 포식자에게 잡아 먹히는 유전적 손실(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하지 못하는) 간의 균형을 재빨리 잡아가면서 생존이라는 지상목표를 달성케 하는 것이죠. 이처럼 포식자의 출현이라는 환경의 변화에 따라 재빨리 진화 프로세스를 작동하는 거피의 생존법은 생태계의 보편적인 법칙입니다.

여러분이 시클리드와 함께 사는 거피라면 어떤 생존전략을 취해야 할까요? 시클리드의 위협으로 살아남기 위한 거피의 진화는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피들이 스스로 진화 프로세스를 인식하고 계획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시클리드에게 금방 눈에 띄는 거피들은 잡아먹히고 어쩌다가 화려하지 않은 몸을 타고난 거피들은 살아남아서 그 유전자를 후대에 물려줬기 때문이죠. 거피들 스스로 적응했다기보다는 '적응을 당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스스로 적응할 수 있는 '의지'가 있습니다. 여기서 '적응의 의지'라 함은 시클리드와 같은 위험한 존재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정교한 전략을 수립하여 실행한다는 의미는 절대 아닙니다. 물론 그러면 좋으련만 시시각각 변화하는 환경에 항상 꼭맞는 전략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오늘 유효한 전략이 내일이면 휴지조각이 되는 현상을 매번 목격하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한때 각광 받던 회사가 구시대적으로 변한 전략을 끌어안고 추락하는 기업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거기서 기업 경영의 교훈을 찾으라고 강요 받고 있으니 말입니다.

진화의 관점에서 적응이란 이런 것입니다. 먼저 몇 가지의 새로운 것을 시도해 봅니다. 한 가지가 아니라 반드시 여러 가지를 끊임없이 시도해야 합니다. 생명체가 진화의 과정에서 생존을 이어가는 힘이 환경에 적응력이 높은 돌연변이를 끊임없이 창출하는 데 있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부터 성공 가능성이 높은 '돌연변이'는 없습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은 이러이러하니 이 전략이 가장 좋을 거야'라는 전통적인 전략 수립 방법은 '기업 생태계'의 진화를 너무나 얕보고 돌이킬 수 없는 실패를 자초하는 만용입니다. 수많은 돌연변이들은 실패로 끝나고 그 중에서 단 하나의 돌연변이만이 생명체의 생존을 보장하는 해법으로 선택되듯이, 다양한 시도 끝에 가장 적합한 전략이 스스로 존재를 드러내도록 해야 합니다.

요컨대, 다양한 여러 전략들을 실험하라는 말입니다. 기업의 사활을 걸겠다면서 하나의 전략에 올인하는 행동은 생존 아니면 절멸이라는 도박과 같습니다. 이런 러시안 룰렛 게임의 유혹에 빠져들기보다 전략의 실패 가능성을 인정하고, 실패하더라도 피해가 덜 가는 방식으로 여러 개의 전략들을 실행에 옮기는 '치고 빠지기'가 현명한 행동입니다. 카운터 펀치보다는 수차례 잽을 날려야 합니다. 직전에 날렸던 잽의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으면서 적합성이 증명된 전략을 점진적으로 찾아내 그것에 집중하는 방식이 우리가 취할 수 있는(취해야만 하는) 올바른 적응의 과정입니다. 이것이 기업이 환경에 적응해 간다는 말의 진짜 의미입니다.

거피의 예에서 봤듯이 생명체는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진화합니다. 생명체는 진화의 흐름을 거부하지 않으며 거부할 의지도 없습니다. 기업은 어떻습니까? 진화의 흐름을 거부하는 기업, 옛날의 달콤한 환경을 그리워하는 기업, 스스로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그러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기업들이 많습니다. 기업 생태계에서 그런 기업들은 제일 먼저 자연선택되고 말, 겉만 화려한 거피 같은 존재입니다.

적응하지 않는다면 적응 당합니다. 여러분의 회사는 어떻습니까?

(*참고논문 : Natural Selection on Color Patterns in Poecilia reticulat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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