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재 받기 전, 상사의 표정을 살펴라   

2012. 3. 12.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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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펜 끝을 입에 무는 방법은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빨로 무는 것이고, 다른 방법은 이빨이 닿지 않게 조심한 상태에서 입술로만 무는 것입니다.  여러분 옆에 연필이나 볼펜이 있다면 두 가지 방법을 따라해보기 바랍니다.  이빨만을 사용해 볼펜 끝을 물 때는 어쩔 수 없이 입이 옆으로 벌어지고, 입술로만 물 때는 입이 앞으로 나오면서 볼이 홀쭉해질 겁니다.

이때 실험 진행자가 나타나서 볼펜을 입에 문 채 종이 위에 찍힌 두 점을 직선으로 연결하라는 요청을 여러분에게 합니다. 또 종이 위에 무작위하게 찍힌 점들을 1번부터 10번까지 순서대로 연결하라고도 합니다. 작업을 마치고 나니 진행자는 여러분에게 그 작업들이 얼마나 어렵게 느껴졌는지를 10점 척도(0점부터 9점까지)로 평가하라고 말합니다. 아마 손이 아닌 입으로 점을 연결하는 작업이 그리 쉽지는 않을 겁니다.



어렵게 작업을 끝내고 나니 진행자는 추가로 두 가지 작업이 더 있다는 말을 전합니다.  8개의 자음과 9개의 모음이 무작위로 인쇄된 종이를 주며 그가 요청한 세 번째 과제는 입에 볼펜을 문 채(입술로만 혹은 이빨로만) 모음에 밑줄을 치라는 것입니다. 작업을 끝내고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역시 10점 척도로 평가해야 합니다.

네 번째 과제는 지금까지의 과제와는 다릅니다. 진행자는 여러분에게 잡지에 나올 법한 만화 4편을 건네면서 각 만화가 얼마나 재미있는지를 10점 척도(0점은 재미없다, 9점은 매우 재미있다)로 평가해 달라고 말합니다.  4편의 만화들은 게리 라르손(Gary Larson)의 'The Fair Side'라는 시리즈에서 발췌한 것들로서 사전 평가에 의해 평균 6.61이란 점수를 얻은 것들입니다. 여러분이 주의할 점은 만화를 보며 재미의 수준을 평가할 때도 항상 입에 볼펜을 물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치가 빠른 분들은 심리학자 프리츠 스트랙(Fritz Strack), 레오나르드 마틴(Leonard  L. Martin), 새빈 스테퍼(Sabine Stepper)가 수행했던 이 실험의 목적이 무엇인지 간파했을 겁니다. 이 실험은 얼굴 표정이 판단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볼펜 끝을 입술로만 물 때의 얼굴은 찡그린 표정( '뚱한' 표정과 같음)과 유사하고, 이빨로 물 때는 입이 옆으로 벌어지기 때문에(즉 웃을 때 움직이는 근육을 동일하게 사용하기 때문에) 웃는 표정과 비슷합니다. 볼펜을 입에 무는 방법으로 얼굴 표정에 조작을 가하면 실제로 기분이 언짢거나 좋을 리 없더라도 그런 감정을 유발되고, 그렇게 변화된 감정 상태가 판단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연구자들이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모두 4가지 과제를 수행했지만 연구자들의 관심은 만화의 재미 수준을 평가하게 한 네 번째 과제에 있었습니다. 앞의 3가지 과제는 실험 참가자들이 볼펜을 입에 문 상태에 익숙해지도록 하기 위함이었죠. 실험 결과, 참가자들은 전체적으로 만화의 재미를 사전 평가 점수보다 전체적으로 낮게 평가했습니다. 아마도 입에 볼펜을 물고 있는 불편함이 만화를 실제보다 재미 없게 평가한 이유라고 추측됩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빨만으로 볼펜을 문 사람들(웃는 표정)이 입술로만 볼펜을 문 사람들(뚱한 표정)보다 상대적으로 만화를 더 재미있게 여긴다는 것이었습니다. 전자의 참가자들은 만화의 재미를 평균 5.14로 평가한 반면, 후자의 참가자들은 평균 4.32라고 평가했던 겁니다. 볼펜을 입술로 물든 이빨로 물든 참가자들이 느낀 불편함은 거의 비슷했기에 만화의 재미에 영향을 미친 조건은 바로 볼펜으로 조작된 얼굴 표정에 있었습니다. 장애인의 고충을 측정하려 한다는 엉뚱한 실험 목적을 사전에 듣고 과제를 수행한 참가자들은 이런 영향을 감지할 수 없었겠죠.

얼굴 표정의 인위적인 변화가 감정의 변화로 이어지고 그 감정이 판단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는 이 실험의 결과는 이성적 판단의 어려움을 보여줍니다. 이성적 판단은 감정에 크게 좌우되고 그 감정은 별것 아닌 조작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볼펜을 무는 것 같은 행위로 조작된 얼굴 표정(얼굴 근육)이 감정에 피드백되고 그 감정은 다시 판단 매커니즘에 피드백되면서 판단 오류의 가능성을 키우는 것이죠.

무언가를 판단하거나 평가할 때 객관적 평가 능력을 과신하지 말고 자신의 감정이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 실험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판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 자신의 감정 상태가 어떤지를 자문하고 그 감정으로 판단 결과가 왜곡될지도 모른다는 점을 인식하더라도 판단의 질을 높일 수 있습니다. 감정이 고조되거나 저하되어 있을 때는 판단을 미루는 것도 좋은 해법이겠죠. 지난 번에 올린 '밥 먹고 합시다라고 말해야 하는 이유?'란 글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이성적이기 이전에 감정과 본능의 동물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어야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언가를 판단하거나 의사결정자에게 판단을 요청하려 합니까? 판단을 위한 근거와 자료도 중요하지만 여러분 자신과 의사결정자의 감정 상태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결재 받을 때 상사의 표정을 잘 살피세요.


(*참고 논문)
Inhibiting and facilitationg conditions of the human sm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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