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한 조직에서 직원은 행복할 수 없다   

2014. 4. 9.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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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는데 사람들은 행복하지 못하다고 느낍니다. 걱정이나 우울, 자살이나 비만 등과 같은 부정적인 지표가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죠. 경제적 성장이 혜택보다는 해악을 가지고 오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바로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이 사회를 역동적으로 만들고 발전을 가져다 주는 원동력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경쟁을 통해 사회와 조직이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죠.


우리는 경제적으로 매우 풍요로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세탁기나, 청소기, TV, 그리고 자동차를 가지고 있을 정도다. 평균수명도 늘어났는데, 2011년 WHO의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의 평균수명은 81세 정도로, 세계 1위는 일본에 비해 2살 밖에 차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옛날보다 적은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우울증, 불안, 스트레스, 알콜 중독 등으로 고통 받고 있죠. ‘사는 게 힘들다’라는 말을 달고 삽니다.


‘사회적 행복 지수’는 국가가 부유할수록 높아지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부유해져도 사회적 행복 지수는 그대로이거나 오히려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이유는 바로 불평등이 심화되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부유함과 기대수명과의 관계는 생각보다 높지 않습니다. 물론 아주 가난하면 기대수명이 낮지만, 국가의 부가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면 기대수명이 더 이상 올라가거나 하지 않죠. 코스타리카의 1인당 국내총생산은 대략 1만 달러 선인데 평균수명은 79세 정도이고, 미국은 그보다 훨씬 부유한데도 79세죠. ‘부유한 국가일수록 국민들이 건강하다’는 가설은 옳지 않습니다.


이치로 가와치와 브루스 케네디는 미국의 50개주를 대상으로 경제적 불평등과 신뢰와의 관계를 밝히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상대적으로 평등한 주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 신뢰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소득 격차가 큰 주에 사는 사람들, 즉 루이지애나와 미시시피, 앨라배마에 사는 사람들은 ‘기회만 있으면 타인들은 나를 이용할 것이다’라고 믿는 사람이 대략 35~40% 정도 됐습니다. 가장 평등한 주인 뉴햄프셔에서는 그렇게 답한 사람들이 10~15% 밖에 안 됐습니다. 


미국 뿐만이 아닙니다. 에릭 어슬러너의 연구를 보면,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수인 지니계수가 클수록 ‘대부분의 사람들을 믿을 수 있다’고 말한 사람의 수가 적었습니다. 지니계수가 0.3정도면 ‘사람들을 믿을 수 있다’는 대답이 40~50% 정도였죠. 우리나라의 지니계수는 2012년 기준으로 0.31이니 아마 비슷한 수준이 아닐까 추측됩니다.



출처: socialistparty.ie



불평등은 사회적 관계를 악화시킵니다. 대표적인 예가 살인율이겠죠. 우리나라에 불평등과 살인율과의 관계를 연구한 게 없어서 미국과 캐나다 사례를 언급하면, 가장 불평등한 주에서는 1년에 살인사건으로 사망한 사람이 150명 이상이고 가장 평등한 주에서는 10명 미만이었습니다. 적대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불평등할수록 다른 사람에 대한 적대감이 크고, 이방인을 덜 도와주고, 더 많이 싸우고, 취약계층에 대한 편견이 더 심합니다. 이처럼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갈등적인 인간관계를 더 많이 경험합니다. ‘묻지마 살인’라는 사회문제 역시 따지고 보면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경고가 아닐까 짐작됩니다.


평등의 효과를 가장 극명하게 살펴볼 수 있는 것은 공산주의 국가들의 기대수명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의 기대수명은 잘 사는 서유럽 국가보다 높았습니다. 동독, 헝가리, 불가리아는 상당히 높았죠. 왜 그랬을까요? 이들 국가가 매우 평등했고 사회적 지위의 격차가 매우 완만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왜 1970년대가 되어 공산주의 국가들의 기대수명이 떨어졌을까요? 1960년대 후반에 동유럽 사회에 시장화 바람이 불었다는 게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됩니다. 클라이드 헤르츠만의 연구에 따르면, 개인에게 경제적 인센티브를 부여한 후로 불평등이 야기됐고, 고위관료들이 이상을 망각하고 자기 이익만 챙기기 시작하면서 불평등이 심화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알바니아는 꾸준히 기대수명이 증가했습니다. 알바니아는 소련의 수정주의가 아니라 중국의 모택동 주의를 따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유럽에서 유일하게 경제 개혁 프로그램(개인별 경제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하지 않았죠.


기업 조직에서는 ‘지위’의 차이를 통해 직원들에게 동기부여 하려고 합니다. 바로 성과주의 제도라는 도구를 써서 말입니다. 능력과 실적에 따라 성과급을 차등 지급하겠다는 것인데 누구나 일 잘하면 돈을 많이 받을 수 있다는 ‘기회의 평등’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남들보다 덜 받는 사람은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괴로워하고, 더 받는 사람은 보상이 보잘것없다며 투덜대면서 서로 불필요한 갈등을 야기하는 모습을 너무나 자주 목격합니다. 본연의 업무를 소홀히 하며 목표 달성에만 매달리느라 다른 사람의 협조 요청을 무시하는 이기주의가 만연하는 등 여러 문제가 성과주의의 효과를 압도해 버립니다. 그 이유는 조직을 불평등한 상태로 몰고가기 때문입니다.


연구에 따르면, ‘자신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까, 나의 사회적 지위는 어느 정도일까’를 걱정하는 태도가 만성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합니다. 미국식 성과주의 제도는 그런 근심 걱정을 유발해서 결국 직원들을 건강하지 못하게 만들죠. 평가해서 등급 매기고 그에 따라 보상을 차등하는 것, 그것이 바로 차별이고 불평등입니다. 엄격한 미국식 성과주의 제도를 실시하면서 ‘우리는 직원들을 차별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면 언행일치에 문제가 있는 것이죠.


불평등이 확대되면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줄리엣 쇼어의 연구에 의하면,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소득격차가 확대(불평등 확대)되면서 사람들이 바라는 희망소득도 빠르게 상승했다고 말합니다. 그것도 2배나 말입니다. 덜 저축하고 소비가 많아졌으며 빚도 늘었다고 하는데, 소득 불평등이 ‘사회적 비교’를 강화하는 바람에 소비에 대한 압력이 증가했다는 것이죠.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협력보다 경쟁이 심화됩니다. 우리가 지금 경쟁이 심화된 사회에 살고 있는 이유는 알고보면 소득 불평등 때문이죠. 그 이유는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소득 불평등이 심화되면 집단간의 사회적 거리가 증가하여 ‘그들’과 ‘우리’를 구분하게 되죠. 그러면 자연스레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형성되고 우월감과 열등감이 강화되며, 소수 집단에 대한 차별과 위계질서 및 권위주의가 심화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익과 물질적 성공이 강조되고 타인의 복지에 대해 무관심해지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회를 공격적으로 착취하려는 동기가 커집니다. 결과적으로 경쟁이 심화되는 것이죠.


경쟁을 협력으로 돌릴려면 그 해법은 소득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민주적 직장에 다니는 직장인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임금 격차를 선호한다고 합니다. 기업에서도 소득 불평등을 조장하는 성과급 차등 같은 제도를 없애야 합니다. 종업원 지주제를 확신시킴으로써 기업의 부가 사용자에게만 돌아가는 관행을 없애야 합니다. 최고경영자가 수십 배 이상의 연봉을 받는 것도 철폐해야 합니다. 소득 격차는 당연한 게 아닙니다. 불평등한 조직에서 직원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참고도서)

‘평등해야 건강하다’, 리처드 윌킨슨 지음, 김홍수영 옮김, 후마니타스, 2008년

‘신뢰의 힘’, 에릭 M. 우슬러너 지음, 박수철 옮김, 오늘의책,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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