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차잔과 울면, 그리고 아저씨   

2019. 2. 12.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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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 손에 이끌려 어쩌다 다방에라도 가면 머리에 스카프를 동여맨 화장기 짙은 누나가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내오던 엽차잔. 그 위에 포개진 빨간 손톱과 엽차의 김과 함께 그녀의 입에서 풍기는 민트껌 냄새가 엽차잔과 늘 따라다니는 흐릿한 감각이다. 


어릴 적엔 중국집에 가도, 백반집을 가도, 어쩔 땐 빵집에 가도 어김없이 만날 수 있었던 엽차잔이 어느덧 우리 주위에서 사라지고 근대사 박물관에 가서나 겨우 볼 수 있는 물건이 되었다. 무겁고 깨지기 쉬운 단점 탓이었을까? 이제 찻집이나 음식점의 물잔은 죄다 스텐레스나 플라스틱이 점령해 버렸다. 엽차잔만 골라 몰살시키는 바이러스라도 있지 않는 한, 어디에 가서나 볼 수 있었던 사기컵이 어떻게 이리 단박에 사라질 수 있는 걸까? 마치 공룡처럼?




한번 멸종된 엽차잔은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중고 사이트를 찾아봐도, 벼룩시장을 이잡듯 뒤져도 비슷한 물건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심지어 일본 후쿠오카의 빈티지 상점을 일부러 찾아갔었는데, 주인이 내가 스마트폰으로 보여준 사진을 보더니 자기네 가게에 있다고 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헌데 그가 들고 나온 잔은 사진과 완전 딴판이었다. 모양도 색깔도 전혀 다른, 회색 질그릇을 같은 거라고 우기듯 말하다니! 난 웃었지만, 사실 그건 주인에게 던진 비웃음이었다. ‘사람 눈을 어떻게 보는 거야?’


수집하기로 마음 먹은 지 근 2년이 되어서야 나는 서울풍물시장의 어느 점포에서 마침내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기대 없이 둘러보는데, 엽차잔 5개가 흰 노끈으로 묶인 채 먼지를 덮어쓰고 있지 않은가? 보아하니 한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소위 ‘데드 스톡(dead stock)’인 듯 했다. 한 개에 1만원. 옛날엔 1,000원도 안 될 가격이었겠지만, 비싸도 어쩔 수 없다. 언제 만날지 모르니까. 하나만 사는 행위는 콜렉터로서는 실격 사유일 터, 나는 5개를 모두 샀다. 쓰다가 깨질 수도 있으니까.


기억 속에 각인된 엽차잔의 모서리 수는 팔각이었는데, 이제와 세어보니 무려 열두각이나 된다. 새삼 신기한 발견이다. 안쪽 면은 원형으로 매끄러운 모양인데, 요새 쓰는 컵에 비해 물이 담기는 양이 별로 안 된다. 기껏해야 100ml 정도? 목이 마를 때는 세 컵 정도는 연신 마셔줘야 비로소 갈증이 풀린다. 그래서 이 컵에는 물컵이라는 말보다 엽차잔이란 단어가 더 어울리나 보다. 엽차잔이란 이름에 걸맞게 본디 찬물보다는 뜨거운 차가 담아 마셔야 하는 컵이다.




어릴 적 기억은 페이지가 대부분 떨어져 나간 그림책처럼 단편적이다. 그래도 유난히 자세히 기억나는 일이 있는데, 그 장면에 등장하는 여러 물건들 중 하나가 바로 엽차잔이다. 열 두 살 쯤 나는 동네 교회를 다닌 적이 있다. 친구가 크리스마스 때 가면 맛있는 걸 준다고 해서 따라갔다가 이제는 얼굴도 희미하게 떠오르는 여선생님의 피아노 소리에 반해 몇 달을 독실한 신도인 체 행세하고 다녔다. 

교회 활동을 하다가 남자 어른들과 안면을 트게 됐는데, 그 중 한 아저씨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다. 내가 지금도 상세히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은 친구와 함께 그 아저씨를 따라 교회 근처의 중국집에서 점심을 먹었던 장면이다. 나는 그때 매번 먹던 짜장면이 아니라 어린 나에게 이름마저 생소한 울면을 주문했다. 실은 아저씨의 추천 때문이었다. “짜장면은 자주 먹잖아. 이 집 울면 맛있어. 먹어 봐” 


아저씨는 자기 몫으로 나온 짬뽕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엽차잔을 손에 쥔 채 그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삶이 어떠했고, 믿음과 소망이 무엇이고, 기독교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을 이야기했다. 울면은 말그대로 울고 싶을 정도로 맛이 없었고, 아저씨 이야기는 목사님 설교보다 재미가 없었다. 점심 사주는 대가로 그보다 혹독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위선자였다. 동네 친구들과 야구 놀이를 하다가 아웃이니 세이프니 하며 옥신각신한 적이 있다. 하필 그렇게 떠들며 놀던 놀이터 뒷집(아파트 1층)이 그 아저씨 집일 줄이야! 처음에는 아는 사람이라 우리를 점잖게 타이를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내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눈알을 부라리며 이 새끼들 저 새끼들 하며 욕을 해댔다. 몽둥이를 들고 나올 기세였다.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눈이 촉촉해질 정도로 예수님의 성스러운 삶을 이야기하던 모습과 우리에게 쌍욕을 날리는 모습은 도무지 하나의 인간으로 포개지지 않았다. 




내가 교회를 더 이상 다니지 않게 되고 지금껏 무교로 버티게 된 계기는 우습게도 그 아저씨 때문이었다. 도저히 교회에서 그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위선자란 단어를 그때는 몰랐지만, 사람좋은 얼굴을 하고 다닐 그의 모습이 어린 나에게 역겨움을 느끼게 했다. 더욱이 피아노 소리가 청아했던 선생님은 개인 사정이라며 며칠 전부터 교회에 나오지 않게 되었으니 ‘나이롱 신자’는 더 이상 교회를 다닐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엽차잔 덕에 이렇게 한 타래의 기억이 고스란히 딸려 나온다. 어찌보면 어릴 적 물건들은 하나하나가 USB 메모리처럼 훌륭한 저장장치가 아닐까? 물건 하나에 기억 한 줌씩. 이렇게 한 줌 한 줌이 모여 소년의 시간이 된다. 생각해 보니, 그 때 이후로 한 번도 울면을 먹지 않은 것 같다. 세상 맛 없는 음식 중 하나를 발견하게 해 준 아저씨 덕분이다. 어쨌든 고마워요,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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