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로의 찢어진 치마   

2009. 3. 7.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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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로의 찢어진 치마


공연히 추웠다, 낮고 어둔 영상들이 헤드라이트에 흔들리고 깨졌다
예쁜 여자들의 치마가 펄럭였다
고운 냄새가 나는데 난, 그게 좋았다
도처에서 어둠보다 밝은 밤이 흥청거렸다, 난 또 그게 좋았다

퇴계로에는 퇴계가 없다고, 멋지게 깨닫는 순간
예쁜 여자들과 어둠보다 밝은 밤이 서로 부둥켜 안았다
그 풍경이 나는 좋았으며
사랑을 하기 위해서라면 추운 것은 다만 추운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사랑이란 갑작스런 추위 탓에 찾아온 쾌변의 즐거움 따위라 믿었다

헤드라이트의 섬광이 초속 30만 킬로미터로 쇄도하며 깨져 나갔다
깨진 것들이 처참히 널려 있었으며
그 피폭 속에 무수한 예쁜 다리들이 어지러이 명멸했다

그게 매우 좋았던 까닭은 표백된 그리움 따위보다 불안한 성욕이
내게는 사랑이었기 때문이었다
절실히 눈부신, 아픈 감각이기 때문이었다, 라고 난 믿었다

공연히 추운 날씨가 쾌변의 전초임을 알게 된 까닭은
퇴계로를 지나며 예쁜 여자들과, 그녀들의 냄새와, 반짝이는 다리들과,
초속 삼십만 킬로미터의 헤드라이트 불빛에 표백된 그리움,
혹은 애 둘 낳고 잘사는 첫사랑 때문이었다.

아니지, 그게 아냐
내 쾌변의 발원은, 어둠보다 밝은 밤의 도처에서
찢긴 치마를 끌어 당기며 눈물 흘리는
바로 당신의 쾌락 때문이었어
바로 당신의 찢어진 동정 때문이었어

찢어진 치마가 펄럭였다
난, 그 냄새가 매우 좋았다


*예전에 쓴 시를 개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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