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 하현달   

2011. 4. 1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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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현달



어둠 속으로 기억이 가라앉는다. 밤의 서풍은 동쪽으로 쌓이고 언덕 아래로 기억이 흘러내린다. 잊을 수 있을 때 잊었으면 좋았을 기억이다. 떠날 수 있었을 때 떠났으면 좋았을 기억이다. 기억은 결이 엉킨 채로 서풍 따라 구르고 어둠을 몰고 다니는 그는 늘 여윈 눈이다. 상실은 늘 나의 몫이고 한때의 기억은 하현달처럼 빛을 잃는다.

누워 어둠 속의 어둠을 본다. 어둠 속의 어둠 같은 그를 본다. 어둠 속의 어둠 같은 그의 기억을 본다. 그는 내게 어둠으로 입맞춘 기억 한조각을 건네고 느리게 돌아눕는다. 그는 만져지지 않는 기억이고 만져서도 안되는 기억이다. 그는 언제나 그랬다. 언제나 슬플 것을 염려하며 언제나 떠날 때를 가늠했다. 언제나 어둠 같은 표정으로 하현달 같이 웃었다. 언제나 손을 먼저 거두고 언젠가 만날 것을 먼저 약속했다.

무모함은 어리석음보다 슬픈 법. 파란 공중전화 앞에 얼어가던 그 겨울날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행복했을까? 자정을 넘어 어둠보다 더 어둔 역으로 몸을 누이던 그날의 석탄차는 내 무모함의 상징이었을까? 나는 젊었지만 여위고 가난했다.

방백을 듣는 관객인 양 그는 하현달의 상실만을 응시한다. 어둠보다 더 어둡게 귀를 닫은 채 일 밀리미터씩 밀리는 서풍처럼 언덕 아래로 구른다. 기억 따윈 존재하지 않는 무덤인 양 천천히, 그는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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