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이 스러진 폐허 위에는
음습한 이끼만 푸르스름히
깨진 돌무덤 아래 짓눌린
천년 고도의 아픔을
그는 바라보고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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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바깥이 시끄러웠다. 옆집에 누가 이사 오는 모양이었다. 난 한번 밖을 내다보고는 침대에 벌렁 누워 2시간인가를 더 잤다. 그날은 일요일이었으므로 난 더 자야할 필요가 있었다.
딩동 딩동! 초인종은 아까부터 계속 울려댔다. 쿵쿵쿵! 쿵쿵쿵! 아예 문을 부술 셈인가? 잠에 덜 깬 눈으로 문을 여니, 한 여자가 있었다.
"옆집에 이사온 사람인데, 망치 좀 빌려주세요. 춤을 위해 필요해요. 전 댄서거든요."
춤과 망치? 망치를 가지고 춤추는 댄서. 이건 또 뭔가?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나는 다용도실 어느 구석에 처박혀있는 녹슨 망치를 그녀에게 건넸다.
"고마워요."
생긋 웃으며 그녀는 자기집으로 돌아갔다. 웃는 모습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사람의 마음을 아열대 해변처럼 평화롭게 만드는 그런 웃음이었다. 그러나 저러나 나는 더 자야 돼.
30분쯤 지났을까? 딩동 딩동! 그녀는 또 문 밖에 서 있었다.
"죄송하지만, 현관 매트 좀 빌려주시겠어요? 춤을 위해서 필요해요. 다시 말하지만, 전 댄서거든요."
춤과 망치와 현관 매트. 망치를 휘두르며 현관 매트를 치마처럼 걸치고서 폴카 리듬에 맞춰 춤을 추는 댄서를 그려보았다. 비현실적인 장면이었다. 아니면 내 상상력이 빈곤한 탓일지도.
"이거 말이요? 당신도 보다시피....."
"네, 알아요. 몹시 더럽다는 것을. 그렇지만 제 춤을 위해서는 충분히 더러워야 할
필요가 있어요."
그즘엔 이상할 정도로 내 주변엔 기이한 일들만 생겼다. 마치 내가 잠에 빠져 있는 동안 어느 누군가가 나를 세상의 변두리로 몰래 떨어뜨려 놓은 듯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 후로도 그녀는 계속해서 내 초인종을 눌러댔다. 진공청소기, 턴테이블, 바퀴 벌레약, 파카글라스, 연필깎이 등등 나에게서 수없이 많은 것을 끊임없이 빌려갔다. 심지어 내 트렁크 팬티까지 빌려달라 했다.
그런데 그녀는 한번도 빌려간 것을 돌려주질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서 다시 돌려받을 생각이 이상하게도 들지 않았다. 그녀의 아열대 웃음이 날 그렇게 만들어 버렸다.
어느새 내겐 아/무/것/도/남/아/있/지/않/았/다. 한번 기침을 하면 메아리가 0.5초쯤 울릴 정도로 내집은 텅 비었다. 딩동 딩동! 그녀가 또 거기 있었다.
"난 당신이 보다시피 아무 것도 없어. 당신이 다 빌려 갔다구. 자, 난 알몸이야."
난 그녀에게 내 알몸을 보여줬다.
"하하, 그렇네요." 그녀는 유쾌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미안해요. 웃어서. 하지만 당신은 나의 춤에 아주 많은 도움을 줬어요. 그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세요."
"자부심?" 내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요, 자부심. 슬퍼하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전 오늘 이사가요. 거기서 또 제 춤을 더욱 향상시켜야 하거든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12%정도 당신이 보고싶을 지도 몰라요. 안녕."
그녀는 내 목에 살짝 키스를 하고 이내 눈에서 사라졌다. 난 한번도 그녀의 춤을 본 일이 없었다. 나에겐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나는 그것을 애석하게 생각해야 할까, 말아야할까. 그녀의 초인종 소리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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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여행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나는 그녀를 보았다.
여행의 피곤함과 지극한 인도 문화 때문에 내 마음은 이미 가난해질대로 가난해져 있었다. 인도에서 나는 마흔이 되었다. 마흔은 왠지 슬픈 나이이다. 슬픈 나이를 축하하는 슬픈 케이크처럼 그녀는 거기 있었다. 우연이란 이런 것이다.
그녀는 무릎을 모으고 앉아 어디론지 먼 곳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원반을 던지는 아이와 호수를 바라보는 연인과 자전거를 구르며
햇살 속을 달리는 어느 여자와 호수 너머 멀리 아파트 단지가 보이는
풍경 속에서 그녀는 정물화 속 화병처럼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고 있었다. 하지만 예전과는 다른 모양의 헤어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조금은 야위고, 조금은 슬픈듯, 작은 무릎 위에 작은 손을 올려 놓고 있었다.
그 손을 나는 기억한다. 그 손이 나를 잡던 그 느낌을 나는 기억한다.
그 손이 내 눈물을 닦아 주고, 그 손이 나를 밀쳐내던 그 순간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이제 잊을 건 없다고, 다 잊어서 잊고 싶은 건 없을 거라고 스스로 단언했었다.
추억은 깊고, 시간은 그 추억의 깊음보다는 짧다.
시간은 짧고, 삶은 흔적없이 사라진다.
내 삶이 사라지기전, 그녀는 이렇게 내 삶에 잠깐 투영된 것이다.
깜깜한 밤하늘로 별을 향해 손전등을 비추듯, 그렇게 우리의 기억은 여리다.
"그 신문 안 볼 거면 제가 봐도 될까요?"
내 옆에 앉은 흑인여자가 이렇게 말하고는 내가 미처 대답하기 전에 신문을 휙 채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 따위엔 관심도 없다는 듯 휙휙 넘기더니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의 나체 사진을 보며 킥킥 거렸다.
너는 다시 패이드 아웃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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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이 프로라 들었소."
"그렇습니다만, 의뢰를 하시려고 합니까?"
"그렇소. 당신이 늘 하듯 그렇게 처리해주면 되는 거요."
"그렇다면 설명이 좀 필요한데요?"
"물론이오. 당신이 그놈에 대해 알아야 하니까. 인상착의뿐만 아니라 그놈의 버릇이라던가, 자주 가는 술집이라던가, 어떤 향수를 좋아한다든가, 어떤 타입의 여자를 선호한다든지, 뭐 그런 것 따위에 대해 조금은 알아 둘 필요가 있을 거라 생각되오."
"그럼요. 전 연구하기를 좋아하지요. 연구 없는 작업은 저에게 빌어먹을 죄책감을 느끼게 하니까요."
"좋소. '그놈'의 인상은 별로 특징이라는 것을 찾을 수가 없소. 어디에서나 볼 수있는 인상이오. 마치 '그놈'은 전세계의 범용함과 호환성을 대표하는 듯한 그런 얼굴을 지니고 있단 말이오. '그놈'의 하루는 범용한 크림스프로 시작하여 범용한 섹스로 끝나는, 전세계 어느곳에 갖다 놓아도 문화적 이질감 따윈 느끼지 않을 그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소"
"그래서 정말이지 나는 '그놈'을 저주하고 있소. '그놈'이 내눈에 띌 때 마다 나는 '그놈'의 범용한 얼굴에 기관총을 갈겨대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느라 여간 힘이 든게 아니오. '그놈'에 대한 나머지 것들은 내가 보낸 봉투 속에 자세히 들어있소."
"네, 알겠습니다. 손님의 의뢰를 수행하게 되어 기쁘군요. 원하시는 처리 일자를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그놈'과 내일 오후 7시 정각 OO 지하철역 플랫폼에서 만나기로 했소.
겉으로는 우리는 친구 사이오. 애석한 일이지만 '그놈'은 날 좋아하는 것 같소.
내가 만나자고 하면 언제든지 '그놈'은 예의 범용한 얼굴 가득 범용한 웃음을 띠고, 매일 입고 다니는 감색 재킷에 하얀 티셔츠와 베이지색 면바지, 그리고 랜드로바를 신고 나타날 것이오. 처음 보는 사람도 '그놈'을 찾아낼 수 있을 거요. 그만큼 '그놈'은 범용하오."
"'그놈'은 시간에 늦는 법도 없소. 정확히 7시 정각에 개찰구에 나타날 것이오.
나는 1분 늦게 장소에 나갈 거요. 당신의 작업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요."
"좋습니다. 그정도면 작업을 위한 사전정보는 충분하군요. 수수료로 1억원을 입금하십시오. "
"알겠소. 1시간 후에 계좌를 확인하시오. 그럼, 수고하시오."
나는 전화를 끊고 담배를 피우고, 설탕 하나에 크림 두 스푼의 인스턴트 커피를 마시고, 소파 위에 누웠다. 그리고 10분 정도 울었다. 옷장에서 감색 재킷과 베이지색 면바지를 꺼냈다. 범용한 세제 냄새가 났다.
나는 내일 감색 재킷과 베이지색 면바지에 밤색 랜드로바를 신고서 정각 7시에 지하철 플랫폼으로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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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에 오른 샐러드가 슬프게 울고 있다.
내가 건조하게 묻는다.
"왜 그래?"
간신히 울음을 멈춘 샐러드가 말한다.
"난 곧 샐러드로서의 품위와 샐러드로서의 외모를 잃게 될꺼야."
맞아. 운명은 샐러드에게도 가혹하지.
게다가 운명은 우리가 도저히 어쪌 수 없을 마지막 순간에
검은 얼굴을 스윽~ 드러낸다.
반짝반짝거리는 그린하우스 안에서 생장점에 힘을 모으고 하늘을 향하여 손을 뻗을 때에는
지금의 운명을 미리 알아챌 수 없는 것이다. 각자의 이름이 있을터인데
샐러드라는 총칭으로 뭉뚱그러져 이름마저 잃어 버리는 것이다.
가여운 샐러드. 그리고, 삶이라는 깊은 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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