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12일(수) 유정식의 경영일기
“둘 중에 어디에 소금이 들어 있을까요?”
나는 여러 주제로 강의를 할 때마다 아래의 그림을 보여주며 이렇게 묻기를 즐긴다. 왼쪽 병은 구멍이 세 개 뚫려 있고 오른쪽 병은 구멍이 다섯 개 뚫려 있는 것 말고 두 병은 색깔이나 모양이 똑같다. 레스토랑에 가면 어디에 소금과 후추가 들어 있는지 헛갈리는 두 개의 병이 나란히 놓여져 있는 것을 자주 봤을 것이다. 아마도 오늘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물으면 통계적으로 따져 본 건 아니지만 대략 “구멍 세 개 짜리가 소금이다”, “아니다. 구멍 다섯 개 짜리가 소금이다.”라고 의견의 거의 반반으로 나뉘는 경향을 보인다. 흥미롭게도 나이가 좀 있는 직원들은 다섯 개 짜리를, 젊은 직원은 세 개 짜리를 소금으로 지목하곤 한다. 어느 것이 소금이다, 라고 말할 때 각자가 드는 근거도 흥미롭다. 소금 결정의 크기가 후추보다는 크기 때문에(왜?) 구멍 다섯 개 짜리가 소금병이라고 말하고, 똑같은 이유로 구멍 세 개 짜리가 소금병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후추가 눅눅하게 굳는 경향이 있으니까(왜?) 잘 나오게 하려면 구멍 다섯 개 짜리가 후추병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교육 참가자들이 여러 가지 근거를 들며 이렇게 왈가왈부하는 모습을 잠시 ‘즐기다’가 “어느 것이 소금병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걸 우리끼리 따지게 만든 제조업체가 잘못이다.”라고 운을 뗀다. 고객의 헛갈림을 매번 유도하고 고객이 확인 과정을 거쳐야만 소금이나 후추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이런 디자인은 ‘고객 경험’을 무시한 ‘나쁜 디자인’이라고 말을 잇는다. 아주 단순한 제품이지만 ‘우리의 제품을 사용할 때 고객이 겪는 고충(반대로 즐거움)은 무엇일까?’라는 기본적인 고민을 하지 않은 채, 이 디자인이 미적으로 아름다우니까(얼마나 미니멀한가!), 혹은 이렇게 만드는 게 돈이 덜 드니까, 이렇게 만들어서 생기는 헛갈림은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간주하며(혹은 아무 생각 없이) 출시했을 게 분명하다고 말이다.
‘고객 경험’이라는 게 말은 쉬워도 그걸 제품이나 서비스 디자인에 녹아 들도록 만드는 건 굉장히 어렵다는 점을 내가 던지는 그 다음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디자인해야 고객들이 소금과 후추를 헛갈리지 않을까요?”
이 질문에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오는데, 가장 빈번한 대답이 “어떤 게 소금인지 후추인지 써서 붙이면 되지 않느냐”란 것이다.
나는 이렇게 되묻는다.
“누가 써서 붙이나요?”
“식당 주인이 붙이면 되죠.”
걸려 들었다! 나는 일격을 가하듯 묻는다.
“식당 주인은 고객이 아닌가요?”
이렇게 물으면 ‘아차!’하는 표정이 그 사람의 얼굴에서 읽힌다. 소금이나 후추라는 표시할 책임을 고객에게 전가하는 것만큼 최악의 제품 출시는 없으니까 말이다. 자동차 내부의 여러 버튼에 글씨나 아이콘을 써 넣지 않고 판매를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어떤 사람은 그냥 냄새를 맡거나 구멍에 뭐가 묻었는지 보면 알 수 있는데 굳이 이런 질문을 왜 하냐는 표정을 짓기도 한다. 고객 경험 따위는 무슨 상관이냐는 아집이 그에게서 느껴진다.
이 밖에, 색깔을 달리한다(소금병은 하얗게, 후추병은 검게), 투명한 유리로 만든다, 구멍을 뚫지 말고 아예 윗부분을 그냥 노출시켜서 안에 뭐가 들었는지 보이게 만든다, 소금과 후추라는 글씨를 제조할 때 음각한다 등등 여러 대답이 나오는데, 나는 제조단가의 상승과 기술 부족(예: 유리로 만들 수 없는 기술적 한계)의 문제를 고려한다면 그리 좋은 해결책은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하면서 교육 참가자들을 더 미궁으로 빠지게 만든다. “고객 경험도 중요하고, 내부 역량과 비용 효율성도 중요하다. 어떻게 만들면 될까?”
참가자들이 말을 잃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걸 잠시 ‘즐기고(나는 참 못됐다)’나서 나는 2년 전(2015년)에 독일의 소도시 ‘오스나부뤼크’의 어느 호텔에서 조식을 먹을 때 직접 찍어 놓은 사진을 ‘짠!’하듯 보여준다. 이때 작은 탄성이 흘러 나온다. 물론 이 사진의 병은 윗부분이 금속으로 돼 있고, 몸체는 유리로 만들어져 있지만, ‘메타포’ 차원에서 이해하면 된다.
“소금이 들어있는 병에는 소금(salt)을 뜻하는 S자 모양으로, 후추병에는 P자 모양(pepper)으로 구멍 뚫어 놓음으로써 손님이 헛갈리지 않고 바로 소금이나 후추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한 디자인이야말로 고객 경험을 충분히 고려한 디자인이다. 그리고 현재의 기술이나 설비를 최대한 그대로 적용하고 제조단가의 상승을 최소한으로 억제했다는 점에서 아주 좋은 디자인이다. ‘콜럼버스의 달걀’ 같은 거라서 알고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런 디자인을 생각해 내기기가 그리 쉽지 않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나의 이런 말에 동의를 하는 표정인데, 꼭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S자를 salt가 아니라 sugar(설탕)으로 생각하면 어쩌죠?” 혹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영어를 잘 모르는데 S자가 뭔 뜻인지 알까요?” 뭔가 딴지를 거는 듯하지만 나는 “좋은 질문이다. 그런 고객 불편을 해소하려면 어떻게 할지 계속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게 훌륭한 디자인의 시작이다.”라고 마무리한다. 더 진행하면 다른 주제로 넘어가지 못하니까.
제품과 서비스 디자인에서 고객 경험은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인식하는 것’과 그걸 ‘실천하는 것’은 굉장히 다른 문제다. 며칠 전 지인이 후진하다가 뒷 차의 헤드라이트와 본네트를 살짝 박은 일이 있었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사고가 발생했던 장소인 모 마트의 무감각 때문이었다. 쇼핑을 하러 마트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던 지인은 주차장이 철문으로 막혀있음을 그제서야 알아차렸다. 마침 마트가 일괄적으로 쉬는 일요일이었던 것이다. 이유를 알고 차를 돌리려는데 중간에 하행 차로와 상행 차로를 구분하는 연석이 높아서 후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인처럼 마트가 휴무인지 모르고 들어온 차가 바로 뒤에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살짝 부딪혀서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지하주차장으로 진입하기 전에 바리케이트나 ‘꼬깔’ 표시로 확실하게 휴무임을 알렸더라면 막을 수 있었던 사고였다. 마트 측은 휴무라고 주차장 진입로 전에 알렸다고 주장하지만, 고객이 그걸 미처 못 보고 ‘아,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갈 수 있네.’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든지, 아니면 ‘이렇게 표시해 두면 알겠지’라고 넘어간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번 대선에서 모 후보의 선거 공보물이 화제에 올랐었다. ‘제19대 대통령선거 책자형 선거공보’라는 문구가 후보자 이름보다 크게 실렸고, 안쪽의 글씨들이 흰 바탕에 연두색(녹색이라기보다)으로 쓰여 있어 가독성이 크게 떨어졌었다. 선거 결과를 떠나서, 과연 그들이 공보물을 받아보는 유권자의 입장에서 점검해 봤는지, ‘유권자 경험’을 공보물 디자인의 제 1요소로 삼았는지 상당히 의심하게 만드는 ‘졸작’이었다. 물론 이렇게 비판하고 있는 나 역시 과연 고객 경험을 충분히 고려하는지 반성해 본다. 고객 경험을 무시하는 점을 하루에 하나씩 발견해서 고치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H군이 지인에게 물었다.
"한 100여만원 정도 물게 됐어요. 뭐 그 정도면 된 거죠."
"아니에요. 그 마트에게도 책임이 커요. 마트 사람들의 책임을 고객에게 전가한 거죠. 반드시 따져야 할 문제라고 생각해요."
"자꾸만 자기네들이 표시해 두었다, 라는 말만 반복하더라구요."
고객 경험을 무시하고 그 책임을 은근히 고객에게 떠넘기는 기업.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그 마트에 다시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의문이다.
( 소금병 후추병 사례는 도널드 노먼의 책 '심플은 정답이 아니다'에서 찾은 것임. 'S'자 'P'자 모양 소금/후추병은 필자가 직접 찍은 사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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