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반쯤 감긴 눈으로   

2008. 5. 1.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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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반쯤 감긴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싶다. 산자락을 낮게 휘감는 희고 풍성한 구름을, 그 밑으로 추억처럼 긴 꼬리를 끌며 지나는 기차를, 몇 가닥의 서늘한 바람이 벌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고요한 풍경을 반쯤 감은 게으른 눈으로 바라보고 싶다.

사는 게 재미없고 삶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 반복되는 일상을 뿌리치고 사람들의 그림자가 어지럽지 않은 곳으로 숨어 들고 싶다. 그곳에서 나른한 몇 날을 보내고 싶다. 맑은 물가에 앉거나 늘푸른 고목 아래에 누워서 끝내 읽지 못했던 1980년대의 연애소설을 읽는다면 어떨까?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며 ‘깊고 푸른 밤’처럼 10%쯤 쓸쓸해지고 싶다.

아픈 대목이 나오면 책을 덮고 물소리 바람소리를 듣다가 잠들면 그만. 그렇게 읽다가 잠들다가, 한껏 빈둥빈둥 거렸으면 좋겠다. 시간이 멈춘 듯 구름은 산모롱이에 걸리고 기차는 느릿느릿 간이역으로 들어온다. 나는 작은 정물이 되어 그 풍경 속으로 흐릿해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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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별이 뜨고 지평선 너머로 하루가 잠길 때, 푸른 잔디에 누운 평화로운 양떼처럼 꿈을 꾸고 싶다. 그 옛날 함께 할 수 없는 사람과 함께 하는 꿈을. 슬프던 지난 서로의 모습을 까맣게 잊어내는 꿈을. 그리하여 그 옛날 차마 하지 못했던 용서의 말을 수줍게 전하는 꿈을 꾸고 싶다.

때론 반쯤 닫은 마음으로 모든 것을 추억하고 싶다. 내가 너에게서 받았던 상처보다 내가 너에게 주었던 상처를 위하여, 상처가 상처로 감각되지 않고 그저 증류된 기억의 한 페이지로 갈무리될 수 있도록 마음의 한 켠일랑 닫아둬야지.

상처를 상처로 기억할수록 스스로를 용서 못한 채로 살아가야 함을 나는 이제야 알기 때문이다. 한껏 외쳐버린 고백의 말보다, 반쯤은 숨기고 반쯤은 내보이는 가난함이 길고긴 삶을 견뎌내게 한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알기 때문이다.

내 몸의 한 쪽 끝에서 또 다른 한쪽으로 투명한 물줄기를 흘려보내고, 그 물 위에 희고 고운 그리움의 징검다리를 놓는다. 누군가 한 뜀 두 뜀 징검다리를 밟고서 내 안으로 들어오겠지. 그의 마른 이마에 내 볼을 맞대고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작은 그의 손을 잡고서 함께 저무는 풍경 속으로 흐릿해지련다. 열려진, 그러나 반쯤은 닫아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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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채꽃, 흐드러지다   

2008. 4. 30.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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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 가니, 지난 주말보다 더 많은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간단하게 산책을 나온 길이라 '똑딱이'로만 찍었다. 꽃이 지고 꽃이 피는 모습을 보면서 계절의 흐름을 느낀다. 언덕 아래로 부는 바람에도 진한 봄 냄새가 났다. 따뜻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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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나는 이런 책을 읽었다   

2008. 4. 30.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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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2008.4)에는 지난 달의 부진을 만회하여 총 9권의 책을 읽었다. 사실 이 중 1권은 읽다가 집어 던졌다. 원문이 어려운 것인지, 번역의 실패인지 도무지 읽히지가 않았다. 그래도 꾸역꾸역 3분의 2를 읽었기 때문에 리스트에 포함을 시켰다. 그 책이 과연 어떤 책인지는 아래에 나온다.

벽 한면 전체를 책장으로 짰는데, 이미 적재량을 초과한지 오래라서 책을 이리저리 포개 놓고 있다. 또 다른 벽을 책장으로 짜야하나... 대학 때부터 지금껏 지출한 책값도 따져보니 만만찮다. 그 돈 차곡차곡 모았면 중형차 한 대 쯤은 너끈히 뽑았을 것 같다.

지금까지의 독서 실적

1월 : 10권
2월 : 12권
3월 : 4권
4월 : 9권

(총 : 35권)

 

아름다움의 과학  : 내적 미(美)가 외적 미보다 중요하다는, 오래된 거짓말에 대한 책

 

텔레비전을 버려라 : 텔레비전의 폐해에 대한 책. 원래 TV를 잘 안 보는데, 이 책 때문에 더 안 보고 싶어졌다. TV의 임상적 폐해 부분이 약한데 그게 좀 아쉽다.

창의성의 즐거움 : 창의성은 개인에게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영역-환경-개인의 조화 속에서 피어난다.

허수  : 제곱하면 -1이 되는 수에 관한 책. 수학에 관한 내용은 좋은데, 중간중간마다 들어가 있는 '문학적 상상력'과의 연결이 매우 어색하다. 뜬금 없다. 그 부분을 빼고 허수에 관한 내용을 좀더 깊게 다뤘으면 좋았을 것을...

 

화(anger) : 이 책을 보고 '천천히 오래 씹어 먹는' 다이어트를 하게 됐다. 화를 발산하면 화가 더 생성된다는 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다.

바이러스 도시 : 제목이 좀 이상하다. 콜레라에 관한 책인데, 콜레라균(비브리오)는 바이러스가 아니라 박테리아다. 도시 생활의 위험을 고발한 책인지, 도시 생활의 편익을 강조한 책인지 어정쩡하다.

홀로 사는 즐거움 : 법정 스님의 글은 참 맑다. 읽다 보면 마음이 착해진다. 70이 넘으셨다는데, 건강하셨으면 한다.

인간에 대한 오해 : 스티븐 제이 굴드. 나는 만연체 문장이 싫은데 그의 글만은 용서가 된다. 600 페이지가 넘는 책을 단숨에 읽었다. 진화론계의 투사였던 그가 이 세상에 없는 게 안타깝다.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 : 이 책이 바로 읽다가 집어 던진 책이다. 뭘 말하려는지 도통 모르겠다. 좀 쉽게 써도 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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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친일파였다?   

2008. 4. 29.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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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 무심코 올블로그에서 내 이름을 친 다음 검색을 해 보니, 이상한 글들이 목록에 떴다. "어? 이게 뭐지?" 오늘 친일인명사전이 공개됐는데 4776명에 나와 동명이인인 사람이 포함된 모양이었다. 궁금증이 발동하여 4776명의 명단에서 내 이름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찾아 보기로 했다.

CTRL+F를 쳐서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을 테지만, 무수히 많은 이름을 하나씩 보면서 내 이름을 찾아보기로 했다.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도 친일파, 태극기를 만들었다던 박영효도 친일파였다. 우리의 국가와 국기가 이제 친일파로 공인된 자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니! 참 씁쓸했다. 그렇게 내 이름을 찾다가 보니, 참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친일을 자행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됐다.

의원, 관료, 경찰, 군, 사법부, 종교단체, 예술분야, 경제분야, 해외지역 등등 곳곳에서 친일파들이 활개를 치고 다녔다는 걸 한눈에 볼 수 있었다. 4776명의 인물들은 친일 행적이 명확히 파악되는 핵심인물들이 선정된 자들이니, 동족을 억압했던 무명의 친일파들은 아마 그보다 열 배, 스무 배는 더 많았을 것이다. Big Brother의 눈과 귀와 몽둥이가 되어 자신의 이웃을 못살게 굴었을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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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경찰' 그룹에 속해 있었다. 경찰이라면 지근거리에서 동포들에게 폭압을 행사했던 자들 아닌가? 인두로 허벅지를 지지고 채찍질에 물고문에 온갓 못된짓을 제 손으로 저지른 자들. 한자(漢字)까지 동명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어쨋든 나와 이름이 같은 사람이 친일파 목록에 속해 있는 걸 보고 있으려니 좀 부아가 났다.

또 한편으로는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내가 만약 구한말에 태어나 일제강점기를 겪었더라면 나는 명단 속의 '그'처럼 친일을 자행했을까? 아니, 살기 위해서 친일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지금의 마음으로는 자발적으로 친일을 자처하지 않을 것 같지만, 목에 칼이 들어 온 상황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면,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했을 수도 있겠다 싶다.

물론 친일의 동기가 자발적이었냐 강압에 의한 것이었으냐에 따라 죄질의 경중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4776명의 명단 안에 포함된 '나' 혹은 '그'. 그는 어떤 몹쓸 친일 행적을 보였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그 배경은 무엇이었는지, 무슨 이유 때문에 친일파에 동참하게 됐는지 알고 싶다.

명단만 우선 공개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차후에 자세한 친일 행적도 함께 열람했으면 한다(자료집이 나왔다는 데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해방된 지 60년이 넘었는데, 이제 와서 친일인명사전에 나온 게 꽤 늦은 감이 있다. 늦은 만큼 속속들이 공개됐으면 한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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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단점을 고치려고 노력하지 마라   

2008. 4. 29.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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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학의 대부, 피터 드러커는 지난 2005년 11월 11일 96세를 일기로 숨졌다. 죽기 바로 직전(2004년)까지 35번째 저서를 출간할 만큼 왕성한 지적 욕구와 열정을 보여 왔던 그가, 그래서 영원히 죽지 않는 경영학의 생불(生佛)로 존재하리라 믿어지던 그가 비로소 우리 곁을 떠났다.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그가 경영학계에 남긴 업적은 실로 위대한 것들이라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다. 주식회사의 개념을 제시하였고, 기업의 도덕성과 인재의 중요함을 역설하였으며, '지식사회', '지식근로자' 등 지식경영의 개념을 주창하는 등 경영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방향과 상(像)을 제시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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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드러커 (사진 출처 : 네이버)


나는 피터 드러커의 저작들을 많이 읽어 보지는 못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경영의 실천'과 '단절의 시대' 정도를 훑어 읽어 본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가 나에게 미친 영향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어느 날 그의 책, '프로페셔널의 조건'을 이리저리 뒤적이다가 발견한 문구는 뭔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던 나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주었고 나의 삶을 새롭게 정의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당시 나는 나 자신에게 참 불만이 많았다. 능력도 보잘 것 없거니와, 성격도 성공하기에는 애초에 글러먹은 것이 아닌가, 이럴 바에는 편안한 조직에 몸을 의탁한 채 짭짤한 월급이나 챙기며 살아가는 것이 내 주제에 걸맞는 게 아닌가 자괴했었다.

그런데, '당신의 단점을 고치려고 노력하지 말라. 거기에 쏟을 노력을 당신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데에 집중하라'라는 그의 말을, 어쩌면 지극히 평범하게 느껴지는 그의 말을 접했을 때 내 가슴을 뚫고 지나가는 커다란 소리를 들었다. '남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나의 장점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그것을 더욱 키울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추락했던 자신감을 점차 회복할 수 있었다. '나는 왜 이것 밖에 안될까' 라는 생각은 푸념에 지나지 않는다하더라도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나를 더욱 옥죄이게 만들 뿐이라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다.

가끔 지치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그의 문구를 떠올려 보곤 한다. 결국 그가 하고자 했던 말은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로 그렇게 된다.'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단점을 떠올리며 자신에 대한 질책과 비난을 즐기기만 한다면 단점은 영원히 단점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리라. 자신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긍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교훈이리라.

단점보다는 장점에 전력투구하라는 말은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기업의 경영활동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경쟁사보다 뒤떨어지는 요소를 끌어올려 봤자 경쟁사하고 별 차이가 없는 '그렇고 그런' 제품과 서비스에 불과할 것이다. 경쟁사를 확실히 제압하려면 자사의 경쟁우위 요소를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수준으로 극대화해야 한다. 이것은 경영의 제1법칙이다.

세스 고딘의 저서 '보랏빛 소가 온다'에서 '잘할 수 있는 것 한 두개를 가지고 가장자리까지 가라'는 주장과, '블루오션 전략'에서 말하는 가치혁신의 ERRC(Eliminate-Reduce-Raise-Create) 방법론 등도 따지고 보면 피터 드러커의 철학과 연결되어 있다. 머리를 감싸 쥐며 고민한 끝에 '다 잘해야 한다'는 전략적 초점이 불분명한 경영계획을 오늘도 만들어 내고 있는 기획부서가 있다면, 피터 드러커의 이 말을 곰곰히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단점을 고칠 시간이 있다면 그 시간을 장점을 더 키우기 위한 시간으로 활용하라. 골고루 잘 하는 사람보다 하나라도 제대로 하는 사람이 필요한 시대이다. 한쪽에 경도되지 않고 여러 분야를 두루두루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한 분야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뒤에 해도 늦지 않다. 그리고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 다른 분야를 쳐다볼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한 우물을 파고 나서 시원하게 물을 들이켜야 다른 세계도 보이는 법이다.

남들이 자신에게 '너는 이것이 단점이야'라는 말을 듣게 되면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가볍게 흘려라. 그가 아무리 선의로 한 말일지라도 '너는 이것이 단점이야'라는 말이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옭아매는 동아줄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사람을 물리적으로 괴롭히는 단점이라면 고쳐야 마땅하다. 그러나 살아가는 방식이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단점이라고 지적 받는 것까지 일일이 대응할 필요는 없다.

당신의 단점을 고치려고 노력하지 마라. 장점을 최대한 끌어 올리는 게 이 시절을 보다 현명하게 살아가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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