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자들의 도시   

2009. 3. 15.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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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자들의 도시]


[My Short Review]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간성은 무엇일까? 과연 인간성이란 게 존재하는 걸까? 인간성은 만들어진 환상이고, 시력을 잃는 일 하나만으로도 인간성은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나약한 걸까? 수많은 물음표 때문에 가슴이 먹먹해서 영화가 끝난 후 찬물을 들이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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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가 몰려온다!   

2009. 3. 15.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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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가 몰려온다고 해서 기상청 사이트에 들어가 위성사진을 봤다.
서해안에 벌써 황사가 당도했는데, 조금씩 옅어지는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다.

황사 조심하세요~!!

(오늘 12시 ~ 20시 사이의 위성사진. 출처 : 기상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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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4일은 화이트데이가 아니라, '파이(π)데이'   

2009. 3. 14.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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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아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3월 14일을 화이트 데이로 알고 있다. 발렌타인 데이도 국적불명인데, 화이트 데이는 그것보다 한술 더 뜨는 괴상한 기념일이다. 눈 내리는 겨울도 아닌데, 웬 화이트 데이?

3월 14일은 수학에서(우리 생활에서도)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숫자인 파이(π)데이다. 알다시피 π는 순환하지 않는 무한소수, 즉 무리수라서 영원히 끝나지 않는 수다. 소숫점 아래 200번째 자리까지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π= 3.

14159 26535 89793 23846 26433 83279 50288 41971 69399 37510
58209 74944 59230 78164 06286 20899 86280 34825 34211 70679
82148 08651 32823 06647 09384 46095 50582 23172 53594 08128
48111 74502 84102 70193 85211 05559 64462 29489 54930 38196 ....

우리 늘 보고 사용하는 바퀴, 컵, 연필, 이어폰 등에는 무한히 뻗어가는 무리수 π 가 숨어 있다. 유한함 속에 무한함이 잠재되어 있다니, 생각해 보면 정말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π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과연 지금과 같은 문화와 문명을 일궈낼 수 있었을까? π는 고마운 수다.


지금은 컴퓨터의 도움으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π를 소숫점 수천 수만 자리까지 알아낼 수 있지만, 오직 펜과 종이 밖에 없던 시절에는 π값을 구하는 게 수학자들에게 큰 도전과제였다. 위대한 과학자 뉴턴은 친구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고 한다. "별로 할 일이 없어서 π의 소숫점 아래 열여섯 자리까지 계산해 봤다네."

소숫점 아래 100자리 까지 구한 사람은 존 마신이었고, 200자리까지 구해낸 건 1844년이 되어서였다. 수학자들은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큰 자릿수까지 π값을 구하려고 경쟁적으로 매달렸다. 마침내 1874년에 윌리엄 생스가 소숫점 아래 707자리까지 구해내기 이르렀다. 생스는 20년 간이나 하루도 빼먹지 않고 오직 π값 구하기에 매달렸다고 한다.
 
생스의 기록은 그 후 71년 동안 깨지지 않았지만, 생스가 구한 π값에는 오류가 있었다. 1947년에 퍼거슨이란 수학자가 소숫점 아래 528자리의 수가 틀렸음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생스의 20년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 후 'π값 구하기 열풍'은 전자계산기(컴퓨터)의 등장으로 무의미해졌다. 1958년에 소숫점 아래 1만자리까지 알아내고 1989년에 소숫점 아래 10억 자리까지 컴퓨터가 척척 계산해 냈기 때문이다. 현재의 가장 성능 좋은 컴퓨터로 사용한다면 이보다 더 큰 자릿수까지 계산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가들은 π의 중요성을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1940년에 미국 인디애나 주 고속도로 관리국의 엔지니어들은 전자계산기의 설치를 주의회 의원들에게 요청했다. 고속도로의 굽은 구간 등을 정확히 설계하려면 π를 계산해야 하는데, 그게 3.14159...로 끝없이 반복되는 무한소수라서 손으로 계산하기 복잡했기 때문이다.

의원들은 회의 끝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전자계산기를 지원할 만한 자금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결책을 생각했는데, 이제부터 π를 4로 고쳐서 쓰기 바랍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조치였다.

사람들이 골치 아프다며 수학을 멀리하는 경향이 있는데,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신(만일 존재한다면)이 창조한 우주의 비밀이 수(數)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을 몰라 준다며 푸념하지 말고, 수학과 과학의 세계를 자신의 체계 안으로 흡수해야 한다. 그게 인문학의 살길이다.

우리가 마시는 공기 중에도,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에도 π가 존재한다. 3월 14일에는 연인에게 사탕을 선사하는 것도 좋지만, 우주의 근원수 중에 하나인 π의 존재를, 그리고 그것의 발견에 공헌한 수많은 수학자들에게 한번쯤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하지 않을까? 찬사를 받아야 할 사람은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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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봄이 오면   

2009. 3. 13.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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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봄이 오면


어디에서 시작됐을까
나 모르는 사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사람과
깨어났다 잠드는 사랑과
살아났다 깃드는 길고 긴 고요는...

다시 시작하고 싶어
그냥, 뭐든지...

갈잎 떨어진 자리에 찬 비가 듣고
비가 언 자리로 눈이 쌓인다
어둔 하늘을 어둔 눈으로 바라보며
마른 눈발을 마른 입으로 먹어보며
헐거워진 보도를 헐거워진 다리로 밟아본다
눈 위로 한 겹 어둠이 쌓인다
어둠 위로 겨울이 쌓인다

너는 나의 깊은 곳을 아파할 때
나는 너의 먼 곳을 돌아와 여기 숨었다
너는 석양을 향해 말 못할 아픔 삼킬 때
나는 속 아픈 하루하루의 겨울을 산다
너와 나는 어쩔 수 없이 이어진 채로 흔들거린다
너와 나 사이에 놓인 겨울이 흔들거린다

집으로 가며 너를 생각한다
너를 생각하며 봄을 기다린다
눈 녹은 자리에 햇빛이 내리고
햇빛 먹은 푸른 싹이 돋아나
투명한 한 자락 바람이 너와 나를 스칠 때
어디 가서 무얼 했으며
무슨 생각을 하곤 했는지 묻지 않으며
나를 맞는 네 손의 따뜻함을 기다린다
나를 안는 네 가슴의 깊은 울림을 기다린다

꽃 피는 봄이 오면
다시 시작이야,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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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겐 과연 자유의지가 있을까?   

2009. 3. 11.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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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TV에서 중고등학생들이 학교에서 얼마나 욕설을 입에 달고 다니는지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방영된 적이 있다. 부모들은 그 모습을 보고 충격에 휩싸였다. 다들 자신들의 자식만큼은 그렇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들의 희망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흥미로운 것은 학생들도 자신들이 단어의 본뜻도 모른 채 욕을 생활화(?)한다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자유에 의해 이와 같이 명랑발랄한(?) 욕설 문화를 부흥 발전시킨 걸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이 유명한 언명은 인간이 지구상에서 자유의지를 가진 유일한 생명체임을 선포하는 문장이다. 자유롭게 선택하고 자유롭게 판단하며 자유롭게 결정할 줄 아는 능력이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가장 강력하며 유일한 기준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경험하는 자유의지가 진짜 지유의지가 맞는 걸까? 그것은 그저 환상에 불과한 건 아닐까? 나는 인간에겐 자유의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인간은 경험하지 못한다. 오늘 점심에 뭘 먹을까 메뉴판을 들여다 볼 때, 우리는 각자의 자유의지에 따라 음식을 선택하는 것처럼 느끼지만, 나의 선택을 하나씩 따져보면 외부의 여러 가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물이다.

다른 사람의 행동과 감정을 모방하는 뇌 속의 '거울 뉴런(Mirror Neuron)', 다수의 힘에 따르는 논리, 어딘가에서 무심코 들은 말 한마디의 위력, 은근하고 치밀한 광고 메시지,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유전자들의 음모 등이 우리의 의사결정을 좌우하는 진짜 주인들이기 때문이다. (블로그라는 한계로 자세한 근거를 제시하기 곤란한 점 양해를....)

"난 쌀국수를 먹겠어" 라고 내린 결정이 과연 내 자아의 자유로운 선택일까? 난 아니라고 믿는다. 인간에겐 자유의지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을 뿐이다. 자유의지는 인간의 뇌가 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복잡해지고 고도의 기능을 갖추게 되면서 부산물로 얻어진 것이다. 뇌 속에서 이뤄지는 모든 의사결정은 사회문화적 요소에 영향을 받는다. 스스로 내린 결정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사실 곤란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단적인 예로, 어떤 사람이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자.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으니, 그를 처벌하기가 어렵다. 여러 가지 외부적인 요인이 작용해서 그로 하여금 범죄를 행하도록 만들었으니 처벌해야 할 사람은 그가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혹은 제도, 문화 등등)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벌이 아니라 상을 줄 때도 마찬가지다.

범죄자들을 처벌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에 자유의지의 존재를 믿어야 하며, 더 나아가 자유의지는 반드시 존재한다고 비판을 가할지 모르겠지만, 이는 주객의 전도된 논리이다. 마치 코가 안경을 걸치기 위해서 진화돼 왔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혹자는 또,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인간으로서 우리는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는 수많은 경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단 말인가, 라고 말할 것 같다. 솔직히 나는 그점에 대해 아직 모르겠다. 나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는 반면에, 사회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옳은 방향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며 행동하려는 의지, 즉 '정향(定向)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향의지란 판단의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주변 상황을 관찰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욕구를 말한다. 다시 말해, 외부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회문화적 요소 중에서 무엇에 높은 비중과 가치를 주느냐에 관한 판단을 말한다. 비록 의사결정의 자유의지는 인간에게 없지만, 자신의 의사결정을 좌우할 외부요소를 어느 정도 필터링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이 존재한다고 본다.

물론 정향의지가 잘못 작동되어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결정을 내릴 수도 있지만, 그것은 벨 커브(bell curve)의 양극단의 사건들이다. 일반적으로 인간들은 사회문화적 규약을 대개 준수하려는 건전한 정향의지를 가지고 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부재하지만 정향의지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옳은 것만 보고 느끼고 경험하려는 의도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그래야 본인의 의사결정을 사회문화적 규약에 부합시킬 수 있으며, 개인의 삶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정향의지를 갈고 닦을 필요가 있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을 경계하라고 했듯이, 인간의 사고는 결코 자유롭지 않으며, 인간 스스로를 자유롭게 만들 수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만들어 간다"라고 자신만만하게 내뱉을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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