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가지로 후대의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리처드 파인만은 배움의 자세에 있어서도 우리에게 신선한 일침을 가한다. 그는 모든 걸 처음부터 자신이 스스로 증명하면서 배웠다. 위대한 학자들이 이미 밝혀 놓은 것이라도 그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가 “유명한 사람이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말을 믿지 말라”고 가르친 대로 그는 의심하면서 배우는 습관을 키웠다.
그는 고대 학자들이 2천년 전에 이미 정립해 놓은 수학 규칙을 스스로 발견하는 데에서 기쁨을 찾았다. “나는 공식을 발견하고 싶었다. 그리스인이든 바빌로니아인이든 누군가에 의해 이미 풀렸다는 것은 내게 아무 상관이 없었다. 모든 문제는 나의 문제였고 나는 여기에서 재미를 얻어야 했다.”
그는 한때 브라질 물리학연구센터에 있으면서 학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학생들에게 강의실 너머로 보이는 바다를 가리키며 빛이 바다에 반사되면 편광효과(偏光 : 빛의 일부만 통과하는 현상)가 발생한다는 걸 설명했다. 학생들은 그걸 보고 아주 재미있어 했지만, 편광이 발생하는 이론과 바닷물 색깔이 푸른 이유를 서로 연결시키지 못했다. 학생들은 그저 모든 것을 그냥 암기할 뿐 그게 어떻게 응용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파인만이 즐겨 타던 밴
파인만은 1년 간의 브라질 체류를 마치고 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브라질에는 물리학을 배우는 어린이들이 그렇게 많고 미국 아이들보다 훨씬 일찍 시작하는데 브라질에는 유명한 물리학자가 별로 없다는 것이 놀랍다.”
50여 년 전 이야기지만 우리에게도 뼈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2천 년대에 사는 우리나라도 그 당시의 브라질과 똑같기 때문이다. "한국엔 유명한 물리학자가 별로 없다"라고 바꿔 말해도 될 정도다. 배우긴 해도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응용할 줄 모른다. 시험을 보기 위해,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그저 외운다. 배우는 것은 책상 머리에서만 머물 뿐 실생활로 이어지지 않는다. 배움은 배움 자체의 의미를 잃은 채 생존의 도구로 전락한지 오래고 회복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정리하면, 배운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의심하면서 파고 들어가는 과정이다. 학교나 책에서 습득한 것들이 진짜 그렇게 되는지 스스로 밝히려는 노력이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배운 바가 실생활에 어떻게 응용할 수 있는지 연구하는 것이 배움이다.
배움 = 의심 + 응용
그렇다면 왜 우리는 배움의 과정에서 항상 ‘의심의 눈초리’를 거둬서는 안 되는 걸까? 아래의 그림을 보라. 두 그래프의 ‘수직상’ 거리는 어떻게 되는지 다음 중 옳은 것을 골라 보라.
(1) 두 그래프는 서로 가깝게 다가간다
(2) 두 그래프는 서로 멀어진다
(3) 두 그래프는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모르긴 해도 아마 많은 사람들은 (1)을 택했을 것이다. 정답은 (3)이다. 의심스럽다면 직접 자를 가지고 재 봐도 무방하다. B 그래프는 A 그래프를 아래 방향으로 그대로 수직 이동시킨 것이기 때문에 수직상의 거리는 항상 일정하다. 내가 위에서 ‘수직상’ 거리라고 작은 따옴표로 묶어 강조했음에도 그걸 눈 여겨 보는 사람은 드물다.
미국의 통계학자인 윌리엄 클리블랜드(William Cleveland)는 두 그래프가 근접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수평상의 거리는 잘 측정하지만 수직상의 거리를 측정하는 데 있어서는 미숙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우리의 눈이 가장 가까운 거리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두 그래프가 점점 근접하는 것처럼 보인다면서, 인간의 심리적인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조작에 의해 쉽게 속아 넘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우리가 무언가를 학습할 때 눈에 보이는 대로 믿지 말고 항상 의심해야 하는 이유다(배움 = 의심).
또한, 배움은 반드시 응용을 통해 완성되어야 한다. 독일의 심리학자 디트리히 되르너(Dietrich Dörner)는 실험 참가자들을 A, B, C 세 팀으로 나눈 다음 그들에게 복잡한 시스템을 다루는 방법을 교육시켰다. 그는 일부러 A팀과 B팀에게는 상당히 자세하고 정교한 절차를 가르친 반면, C팀에게는 체계적이지 못한 방법으로 대충 가르쳤다.
당연히 A팀과 B팀은 교육에 대해 만족감을 나타냈고 C팀은 교육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나 되르너가 교육의 결과를 응용해야만 풀 수 있는 과제를 내 주자 세 팀의 실제 성과는 별 차이가 없었다. 어찌된 일일까?
우리는 보통 어떤 지식을 알고 나면 스스로 ‘똑똑해졌다’고 착각하기 쉽다. 파인만이 실망감을 표했던 브라질 학생들도 아마 그랬을 거다. 하지만 그 지식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유창하게 말할 수 있다 해도 현실에서 그걸 사용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커지지는 않는다. 많은 학자들의 연구 결과다. 되르너는 “지식의 ‘습득’은 그 자체로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경험을 대신하지도 못한다”고 말한다. 반드시 응용을 통해 체득된 지식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배움 = 응용).
배우는 과정에서 의심하고 응용하는 자세를 꾸준히 한다면 미처 알지 못했던 오묘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으며 기초를 다질 수 있다. 단순히 외우기만 하면 그건 ‘문장’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이론으로 배웠거나 상식으로 아는 것들이 사실 옳지 않다는 걸 깨달음으로써 생활에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만일 비행기에 2살 미만의 유아를 데리고 탑승할 때 어른의 무릎에 앉히지 말고 반드시 유아용 좌석에 앉히도록 의무화한다면 많은 부모들은 별 의심 없이 환영 의사를 보일 것이다. 유아용 좌석이 안전을 보장한다는 걸 상식으로 배워왔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유아용 시트가 안전하듯이 비행기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러나 실은 유아용 좌석이 유아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자동차의 유아용 시트도 안전을 더 위협하긴 마찬가지다. 많은 운전자들이 시트의 안전함만 믿고 더 난폭하게 운전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아이를 반드시 유아용 좌석에 태워야 한다면 비싼 항공기 요금을 그만큼 더 내야 한다. 그래서 비행기보다 훨씬 위험한 자동차로 여행하는 걸 선택하게 되고, 안전을 위해 내린 조치가 오히려 더 많은 아이들의 생명을 잃게 만든다. '잘' 배우지 않으면 위험해질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은 일견 당연한 듯이 보이는 질문을 던져보자.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로 응용될 수 있는지 고민하자. 삶의 지혜는 단순하며 자명한 듯 보이는 질문에 답하고, 지식과 현실을 연결하려는 노력을 통해 체득되는 것임을 기억해 두자. 삶은 늘 배우는 과정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