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조건과 충분조건, 그 차이를 아십니까?   

2009. 6. 1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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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해결사 여러분은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이란 용어를 고등학교 때(혹은 중학교 때)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신문기사나 방송에서 '무엇은 무엇의 필요조건이다'라는 말을 듣곤 합니다. 그런데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이 각각 무엇인지 구분해 설명할 수 있는지요?

제법 많은 분들이 이 두 용어의 차이를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습니다. 서로 혼용하지요. 그래서 이 글에서는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의 의미를 파헤쳐 보겠습니다. 설명에 앞서, 다음의 두 문장 중에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나 택해 보기 바랍니다.

1) 노력은 성공의 필요조건이다.
2) 노력은 성공의 충분조건이다.

답을 골랐나요? 확실하게 어느 하나를 택한 다음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면, 굳이 이 글을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뒤에 이어지는 글을 읽어 보기 바랍니다. 약간 수학적인 표현이 등장하지만 이해하는 데 어렵지 않을 겁니다.

'P이면 Q이다'라는 명제가 참이라고 가정하겠습니다. 'P이면 Q이다'인 참 명제를 수학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P  ⇒ Q


이 때, 수학에서는 P는 Q이기 위한 충분조건이고, Q는 P이기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말합니다. 만일 P와 Q가 동일하다면(이를 '동치'라 합니다) P는 Q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 혹은 Q는 P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라고 하죠. 좀 어렵나요?

P  ⇒ Q 라는 표현을 집합으로 나타내면,  P  ⊂ Q 가 됩니다. 충분조건인 P가 필요조건인 Q의 부분집합이 되죠. 쉽게 말해 '부분집합은 충분조건, 전체집합은 필요조건'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이제 위에서 제시한 퀴즈의 정답을 알아보겠습니다. 노력이 성공의 부분집합일까요? 아니면 성공이 노력의 부분집합일까요? 아직 모르겠다구요? 그렇다면 벤다이어그램으로 그려보면 명확하게 보일 겁니다.

위의 1)번 문장 '노력은 성공의 필요조건이다'는 곧 '노력 ⊃ 성공'이고, 2)번 문장 '노력은 성공의 충분조건이다'는 '노력 ⊂ 성공'입니다. 따라서 벤다이어그램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림이 보니 이해가 더 안 간다구요? 설명해 보겠습니다.

먼저 2)번 그림부터 설명하는 게 좋겠군요. 이렇게 비유해 보면 어떨까요? 신(神)이 앞으로 태어날 인간 아기의 성별을 결정한다고 해보죠. 신이 '넌 여자로 태어나거라'고 말하면 무조건 '인간'이라는 속성을 자동적으로 부여 받습니다. 이와 동일한 논리로, 2번) 그림은 노력하면 곧 성공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노력하기만 하면 무조건 성공이라는 속성을 보장 받는 거죠.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노력해도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노력이 성공을 보장하지 못하죠. 그러므로 2)번 그림은 틀렸습니다. 노력은 성공의 충분조건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1)번 그림은 어떨까요? 이 그림은 성공한 사람들은 곧 노력한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에는 동의하십니까? 동의하는 분도 있겠고, 그렇지 않은 분도 있을 겁니다. 동의하지 않은 분들은 행운이나 타인의 전적인 도움으로 성공할 수 있으므로, 성공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노력한 사람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말할 겁니다.

맞습니다. 노력은 성공의 필요조건도 아닙니다. 노력과 성공 간의 관계는 엄밀하게 말하면 위의 1)번 그림이 아니라, 아래의 3)번 그림처럼 서로 겹쳐진 모습이라고 말해야 정확합니다.

결론적으로, 노력은 성공의 필요조건도 아니고 충분조건도 아닙니다. 그래서 위 퀴즈의 정답은 없습니다. 그러나 수학적인 엄밀함을 따지지 않는다면, '노력은 성공의 필요조건'이라는 1)번 그림이 맞다고 허용할 수 있습니다. 성공하려면 노력이 필요하다고 우리는 흔히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노력은 성공의 필요조건이다'라고 말하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수준에서) 옳다고 판단해도 됩니다. 하지만 느슨하게 용인해 준다고 해도 노력은 성공의 충분조건은 결코 아닙니다.

이제 좀 어려운 문제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의 의미를 실제로 사용한 케이스가 없나 인터넷을 검색하던 중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발견했습니다. 앞에서 알려 드린 기초 지식을 바탕으로 이 기사 속에 나오는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이 옳게 쓰였는지 판단해 보기 바랍니다. 

...(전략)...  국토해양부 해양개발과의 OOO 연구원에 따르면 좋은 물을 판별하는 기준은 크게 2가지, 즉 '유해요소가 없는지'와 '유익한 성분이 있는지'로 나뉜다. O 연구원은 "해로운 요소가 없는 깨끗한 물은 좋은 물의 필요조건이라면, 유익한 성분이 함유된 건강한 물은 좋은 물의 충분조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 (후략)


말이 좀 어렵죠? 이를 명제로 풀면,

유익성분 있는 물 → 좋은 물    ( 유익성분 있는 물 ⊂ 좋은 물)
좋은 물 → 유해성분 없는 물    ( 좋은 물 ⊂ 유해성분 없는 물)
즉,
유익성분 있는 물(P)  → 유해성분 없는 물(Q)

 

연구원의 말이 사실이라면, P는 Q의 충분조건이고, Q는 P의 필요조건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를 각각 따져보겠습니다. 좀 어렵더라도 찬찬히 읽으면 흐름을 따라갈 수 있을 겁니다.

[P가 Q의 충분조건인지 따져보기]
연구원의 말대로, P가 Q의 충분조건이 되려면, P가 참일 때 항상 Q도 참이어야 합니다. P가 참인데도 항상 Q를 참이라고 말할 수 없다면, P는 Q의 충분조건이 아닙니다. '유익성분이 있는 물이면(P), 항상 유해성분이 없는 물(Q)'이라는 조건문은 참일까요, 거짓일까요? 

유익성분 뿐만 아니라 유해성분도 있고 유해하지도 유익하지도 않은 성분이 들어있을 때에도 우리는 그 물을 유익성분이 있는 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익한 성분을 파란색으로, 유해한 성분을 빨간색으로, 유익하지도 유해하지도 않은 성분을 노란색으로 표시해서 보면 금방 알 수 있지요.


위 그림과 같이 유익성분이 있는 물이라면 유익성분(파란색) 뿐만 아니라 유해성분(빨간색)이 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런 물을 유해성분이 없는 물이라 말해도 될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따라서 이 조건문은 거짓이고, '유익성분이 있는 물'은 '유해성분이 없는 물'의 충분조건이 아닙니다. 연구원의 말이 틀렸다는 소리죠.

[Q가 P의 필요조건인지 따져보기]
이번에는 반대로 따져보죠. 유해성분이 없는 물(Q)는 유익성분이 있는 물(P)의 필요조건일까요? Q가 P의 필요조건이 되려면, Q가 참이 아닐 때 P도 항상 참이 아니어야 합니다. Q가 참이 아닌데, P가 참인 경우가 있다면 Q는 P의 필요조건이 아닙니다.

그대로 대입해 보겠습니다. "유해성분이 없는 게 참이 아니라면(즉 유해성분이 있는 물이라면), 유익성분이 있는 것도 항상 참이 아니다(즉, 유익성분이 없는 물)"가 성립되어야 Q는 P의 필요조건이 됩니다. 과연 그럴까요?


유해성분이 있는 물이라고 해서 유익성분(파란색)이 들어가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 바로 위의 그림의 왼쪽처럼 말입니다. 왼쪽 동그라미와 오른쪽 동그라미 사이에 모순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이 조건문은 거짓이고, 유해성분이 없는 물(Q)은 유익성분이 있는 물(P)의 필요조건이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해보면, 유익성분이 있는 물과 유해성분이 없는 물 사이에는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의 관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연구원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연구원의 말이 옳다고 해도 그 말을 읽거나 듣는 사람들이 언뜻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이라는 어려운 개념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굳이 이런 용어를 쓰지 않고서도 쉽게 자기의 생각을 전달하는 게 의사소통의 오류를 줄일 수 있습니다. 연구원은 ""해로운 요소가 없는 깨끗한 물은 좋은 물의 필요조건이라면, 유익한 성분'만'이 함유된 건강한 물은 좋은 물의 충분조건이라 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했어야 해석의 오류를 막을 수 있습니다.
 
더 좋은 방법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좋은 물이 되려면 반드시 유해성분이 없어야 하고, 거기에 유익한 성분까지 포함되면 더 좋은 물이다

" 이렇게 말해도 의미는 고스란히 유지됩니다. 게다가 듣는 사람들이 쉽게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해결사는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의 의미를 올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보고서를 쓰거나 프리젠테이션을 할 때 가능한 한 이렇게 어렵고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한 용어를 쓰지 않는 게 좋습니다. 의뢰인이 문제의 해결책을 수용하도록 만드는 게 목적이지, 의뢰인을 교육시키는 것이 문제해결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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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은 곧 지름길입니다.   

2009. 6. 11.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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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를 해결하는 과정 중에 우리는 과거의 경험, 문헌 자료, 논리적 근거, 다른 사람의 충고 등 여러 가지 정보와 요소를 바탕으로 해답에 접근해 갑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직관'입니다. 직관이 없다면 문제 해결 과정은 꽤 지난하게 진행되다가 끝내 흐지부지되고 맙니다.

직관이란 말을 풀어 쓰면 '곧바로 꿰뚫어 본다'라는 뜻입니다. A가 문제이고 B가 해답이라면, A의 위치에서 B에 이르는 지름길을 대번에 알아차리고 딱히 논리적이지 않지만 나름의 근거를 통해 B를 찾아내는 능력이 바로 직관입니다.

화재나 테러와 같이 긴박한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동적으로 아는 능력, 진맥만 해도 환자의 질병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능력, 무의미하게 보이는 숫자들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능력 등을 우리는 직관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직관이란 신비하고 천부적인 능력이라고 여깁니다.

해답은 저 너머에...


지난 글('쉽다고 과정 무시하면 큰 코 다칩니다')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반드시 과정을 중시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곧바로 결론을 내지 말고 찬찬히 과정을 밟아가야 옳은 답을 얻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그 글에서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더니, 이제 직관도 중요하다고? 서로 모순 아닌가?"라고 말입니다. 이런 의문을 가지는 이유는, 'A의 답은 B가 맞다'고 말하듯이 금방 결론을 내는 능력으로 직관의 의미를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직관은 답에 이르는 '과정'을 대번에 알아차리는 능력입니다. 답(결론)을 곧바로 제시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물론 직관이 뛰어난 사람은 곧잘 답을 말하지요. 하지만 그 사람은 어떤 과정과 경로를 거쳐 답에 이르러야 하는지 무의식적으로 알아차리기 때문에 답을 빠르게 말하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답이 머리 속에서 불쑥 떠올랐다 해도 그것은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문제 풀이 과정의 지름길을 찾아냈기 때문이지, 그냥 답이 뿅하고 나타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직관은 '이 길로 가면 답을 찾을 수 있어'라고 스스로에게 일러주는 능력입니다. 이를 뇌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싶지만 길고 어렵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지름길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지름길의 데이터베이스는 부단한 연습과 습관으로 쌓입니다. 천부적인 능력이 아닙니다. 초자연적인 힘은 더더욱 아닙니다. 충분히 연습하고 경험하면 얻어지는 후천적인 능력입니다. 아인슈타인과 같은 천재만이 누리는 특권이 아닙니다. 열심히 배우고 익혀서 몸의 일부처럼 체득되면 맡은 영역에서 뛰어난 직관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경험을 데이터베이스화해서 기록한 다음 필요할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꺼내 쓰는 능력이죠.

지능이 좋은데도 문제 해결에 쩔쩔매는 사람이 있는 반면, 지능은 보통 수준이지만 문제 해결에는 척척박사가 있습니다. 그 차이는 경험을 통해 얼마나 직관이라는 능력을 갈고 닦았느냐에 있습니다. 베테랑이란 머리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 풍부한 경험을 기반으로 직관이 뛰어난 자를 일컫습니다. 

물론 직관이 뛰어나다고 해서 항상 올바른 답을 구한다고 보장하지 못합니다. 종종 직관은 잘못된 방향의 지름길을 알려주기 때문이죠. 직관 능력에 논리적인 추론 능력을 더할 때 문제 해결에 완벽을 기할 수 있습니다. 답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해도 더 깊이 생각하고 판단해서 논리적인 기반을 마련할 때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납득시킬 수 있기 때문이죠. '회의주의자'가 될 필요가 있습니다. 논리적인 추론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루기로 하지요.

정리해 봅시다. 문제 해결의 '달인'이 되려면 직관이 필수적입니다. 직관은 문제 풀이의 지름길을 대번에 알아차리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매번 옳은 지름길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풍부한 경험과 부단한 노력이 밑바탕을 이뤄야 합니다. 경험과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직관이란 그저 '감(感)'에 불과함을 기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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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다고 과정 무시하면 큰 코 다칩니다   

2009. 6. 10.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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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이론(라프 코스터 저)'이라는 책에서 아래와 같은 사례를 발견했습니다.

x2 + 5 = 30

x는 얼마일까?

주위 사람들에게 이 문제를 제시해 보면 어떨까요? 어떻게 답을 이야기하는지 들어보면, 그가 문제해결(Problem Solving)의 기본기 중 하나인 '과정 중시'를 잘 하는 사람인지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가 'x = 5'라고 금방 답한다면, 그는 답을 내는 것에 급급해서 과정을 무시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문제의 함정은 '엄청 쉽다'는 데에 있습니다. 쉽기 때문에 과정을 생략해도 된다고 유혹하죠.

직접 실험을 해봤습니다. 4~5명에게 물어봤으니 통계적으로 유의한 표본은 아니지만, 5라고만 답할 뿐 x = -5 를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5 도 분명 해답인데 말이죠.

문제해결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결과보다는 과정에 더 무게를 둡니다. 예컨데 그들은 이 쉬운 문제를 풀 때에도 다음과 같이 과정을 전개합니다.

x2 + 5 = 30
x2 = 30 - 5 = 25
x =  ±√25
x ±5
 
쉬운 문제를 이렇게 일일이 풀이 과정을 써내려 가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찮게 보이는 문제라도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면 올바른 답(±5)을 얻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풀이 과정을 꼼꼼하게 따지는 사람을 융통성 없다고 놀리기 전에 그들의 문제해결 역량의 기본기를 유심히 살펴볼 일입니다.

저는 요즘 시나리오 플래닝을 주제로 몇몇 기업을 대상으로 워크샵을 진행하는 중입니다. 방법론을 습득하기 위해 제 책('시나리오 플래닝')에 수록된 '길동이의 딜레마' 사례로 시나리오 플래닝을 연습하는 시간을 워크샵 초기에 진행합니다. 길동이의 딜레마는 다음과 같습니다.

길동이는 광화문 근처에 있는 OO호텔 커피숍에서 저녁 9시에 만나 애인에게 프러포즈를 할 계획이다. 여자친구는 성격이 불 같아서 단 1분이라도 늦는 걸 굉장히 싫어한다. 만일 길동이가 늦게 호텔에 도착한다면, 프러포즈는 엉망이 되고 여자친구는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날 게 확실하다. 길동이는 프러포즈를 성공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제시간에 호텔에 도착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사장님이 길동이에게 오후 늦게 중요한 일이 생길 것 같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만일 그 일을 하게 된다면 빨라 봤자 회사에서 8시에 출발할 수 있다. 다행히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7시에 퇴근이 가능하다.

강남에 위치한 회사에서 호텔로 가려면 승용차로 평균 1시간 걸리지만, 운이 좋아 길이 잘 뚫리면 30분, 반대로 길이 막히면 2시간이나 걸린다. 그렇다고 차를 놔두고 가기는 싫다. 프러포즈를 끝내고 여자친구와 함께 교외로 멋진 드라이브를 하고 싶기 때문이다.

아, 길동이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제가 이 사례를 이야기하면 여기저기서 웅성웅성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약속 장소를 변경하면 되잖아.", "차를 렌트하면 될텐데", 혹은 "저런 여자와 왜 만나? 끝내 버려" 등등 다양한 해결책들이 즉각 제기됩니다. 위에서 이야기했다시피 이 사례는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소소한 딜레마라 '쉽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즉흥적으로 제기된 해결책 중 몇몇은 길동이가 채택해도 될 만한 훌륭한 방안인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길동이가 처할 상황(시나리오)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최적의 해결책을 찾기 어렵습니다. 시나리오 플래닝은 해답을 즉각 토해내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라 '문제를 어떤 프로세스로 해결해야 하는가'의 방법론 중 하나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의미를 가집니다.

최적의 해결책을 원한다면 과거의 경험을 통한 추론과 직관으로 결과를 바로 내놓으려는 관성을 잠시 억눌러야 합니다. 그 대신, 문제 해결에 접근하는 방법론, 방식, 프로세스, 전제조건 등을 먼저 생각하려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경험과 직관도 문제해결에 필수적인 능력이자 조건이지만, 해답을 내는 데 적용하지 말고 과정을 짜는 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해결책을 다른 사람에게 설득하려면 과정의 엄밀함이 반드시 전제돼야 합니다. 과정이 생략된 결과는 그 효과가 높다 하더라도 의심 받거나 거센 반대에 봉착하고 말죠. 현 정부의 '밀어붙이기' 식 정책에 국민들이 크게 반발하는 이유는 뭘까요? 과정(정책의 타당성 분석 등)을 몽땅 생략한 채 자신들의 이념, 신념, 이익 등에 근거한 답(결과)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겐 과정을 건너 뛰어도 될 만큼 문제가 쉬운가 봅니다. 과정을 중시하지 않으면 이해와 지지를 얻지 못한다는 단적인 예가 아닐까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고 해서 항상 최고의 전략을 수립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직관적으로, 혹은 별 생각없이 제시한 해결책이 멋지게 성공하는 경우가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예외적이어서 (언론이나 사람들의 인식에서)돋보일 뿐입니다.

소소한 고민에서 중차대한 딜레마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을 찾으려면 '답을 먼저 생각하지 말고 과정에 집중'해야 함을 기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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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신념 vs. 경영 컨설팅   

2009. 6. 9.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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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저에게서 떠나지 않는 의문 하나가 있습니다. 마음 속에서 자꾸 떠오르는 질문이지만 어떤 답을 내려야 할지 몰라서 미궁에 빠진 듯한 느낌입니다. 두 개의 입장이 서로 등을 돌리고 앉아서 제가 빨리 판단 내려주길 재촉하는 형국이랄까요?

제 안에서 싸우는 의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경영 컨설팅과 진보적 신념이 병존할 수 있을까?

경영 컨설팅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기업이 처한 문제를 진단하여 바람직한 해결방법을 알려주는 자문 서비스입니다. 요즘엔 기업에서 꺼려하는 업무를 대신 수행해 주는 '아웃소시(Outsourcee)'로 그 위상이 낮아진 면이 없지 않지요.

경영 컨설팅의 고객은 누구일까요? 당연히 컨설팅을 의뢰한 기업이라 생각하겠지만, 구체적으로 따져 들어가면 다릅니다. 컨설팅을 발주하고 컨설팅 결과의 실행 여부를 결정하는 권한이 있는 사람들이 누굴까요? 바로 CEO를 비롯한 경영자들입니다. 좁은 의미의 고객을 '돈 주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면, 경영자들이 바로 '실질적인' 고객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경영 컨설팅 서비스는 경영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근로자나 노조 편에 서서 컨설팅을 수행하는 사례는 지극히 이례적으로 여겨지죠. 혹자는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업의 문제를 잘 해결하려면 어떤 입장에도 치우침 없이 객관적인 관점을 견지해야 옳지 않겠나?"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컨설팅 결과의 수용 여부를 결정하고 그에 따라 Fee를 지불할 권한이 경영자들에게 있으니, 컨설팅 업체는 은연 중(혹은 노골적으로) 경영자 편에서 보고서를 작성하게 됩니다. 노조가 의뢰하거나 요구한 컨설팅 프로젝트일지라도 돈줄을 경영자들이 쥐고 있기 때문에 노조의 입장을 대변하는 데에 한계가 있습니다.

사회과학엔 문외한이라 진보의 정확한 개념을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저 기업(경영자) 입장보다는 근로자 입장을 대변하고, 승자독식보다는 평등을 강조하며, 성장보다는 분배와 삶의 가치에 초점을 맞추는 가치가 진보라고 어렴풋이 짐작할 뿐입니다.

기업 경영의 관점에서 보면, 신자유주의가 부르짖는 기업 경영의 무한한 자유보다는, 도덕적 해이와 부조리를 제도 차원에서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이 진보 이념인 듯합니다. (틀리면 지적해 주십시오.)

딱 들어맞지 않지만, 제가 지닌 신념의 스펙트럼은 진보 이념과 대개 일치합니다. '핵발전(원자력 발전)'을 지지한다는 측면에서 '진보주의(이런 말이 있나요?)'와 배치되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합리적 진보주의자라 여깁니다.

여기서 저의 심적 갈등은 오래 전부터 시작됐습니다. 경영자의 입장을 대부분 대변해야 하는 컨설턴트 vs. 진보적인 신념을 가진 컨설턴트. 물과 기름이군요. 어렵습니다.

어떤 분들은 '사회적 기업'이나 사회단체들을 대상으로 컨설팅을 하면 되지 않겠냐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허나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규모를 갖춘 사회적 기업은 별로 없습니다. 있다해도 아직 영세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해서 컨설팅까지 의뢰할 단계는 사실 아니죠. 마켓 사이즈가 작아서 컨설팅 업계 입장에서는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결부되면 경영자 입장을 대변하는 컨설팅 시장이 훨씬 매력적입니다.

갈피를 잡기 어렵습니다. 진보적 신념을 택한다면 컨설팅을 떠나든가, 사회적 기업이나 '약자'입장을 대변하는 재야 컨설턴트로 포지셔닝하든가 해야겠지요. 경영자를 대변하는 '실용적인' 컨설턴트로 진로를 굳힌다면 신념의 변절로 인한 뻔뻔함을 각오해야겠지요.

저의 내적 갈등이 앞으로 얼마나 계속될지 모르겠습니다. '비가 오면 짚신 장수가 한숨 쉬고, 날이 좋으면 나막신 장수가 한숨 쉰다'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이렇게 '박쥐'처럼 내내 살지, 아니면 확실하게 입장을 정리하든지 결정을 내릴 시기가 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두고보면 알겠지요. ^_^

( 두고 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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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ism 12] My Room   

2009. 6. 9.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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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내 어둔 방의 불을 켠다.
신발을 벗고, 가방을 내려놓고, 자켓을 벗어 옷장에 걸고,
냉장고를 열어 찬물을 한컵 들이킨다.

안경을 벗어 눈을 비비고, 이 방의 침묵을 깨뜨리려고 보지도 않을 TV를 켠다.
침대에 걸터 앉아 심각한 표정을 하고 뉴스를 전하는 여자앵커의 눈에
내 눈을 맞춘다. 그녀의 눈의 깜박임이 몇번인지 세어본다.
한번, 두번, 세번...
오늘도 몇몇이 무슨무슨 이유로 어찌어찌 했다는, 똑같은 포맷의
단신들을 들으며 그처럼 평이한 나의 하루를 잠깐 회상한다.

누구인지 모르는 전화가 온다.
"거기 어디어디 맞죠?"
잘못 걸린 전화가 요즘에 많아졌다. 그리고 대부분 같은 사람의 목소리다.
내가 싱가폴에 가 있는 동안 자동응답기에 여러 차례 녹음된 그 목소리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거짓쪽지를 전해준 탓이겠지.
"전화해요, 여기로" 
나는 잠시 웃음 몇 가닥을 바닥에 흘린다.

하루의 냄새가 밴 옷을 벗는다.
뜨거운 물을 온 몸에 쏟는다.
Ravel의 '죽은 황녀를 위한 파반느'을 허밍으로 부르면서
내가 나의 밖으로 보여줘야 했던 거짓과 오만을 씻는다.
지금 이 순간은 본래의 나와 화해하는, 나만의 시간.

샤워를 하고 난 후 내 피부의 물기가 말라갈 때의 느낌이 좋다.
그 느낌과 함께하는 John Mills의 기타 소리가 좋다.

낮 동안 비어있던 방에 나 하나로 인해 엷은 생기가 돈다.
둘이 아니어도 좋다. 내가 만져주고, 내가 눈길을 줄, 이 빈방의 물건들,
나에게로 와 내 외로움을 닮아가는 것들, 그들이 나와 함께 있으니까.

내가 없는 동안, 이 빈 방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궁금해진다.
빈 방을 처음 들어설 때의 무거운 침묵은
아마도 소란스러움의 급격한 입막음일지도 모르지.
그래서 나는 빈 방을 들어서면서 "잘 있었어?" 라고 말하기를 좋아하게 됐다.
짐짓 그것들이 경계를 풀고 다시 살아나 나에게 말을 걸어 주기를 바라는 듯이.

내가 밖에 있어도 철저히 나를 위해 준비된, 철저한 빈 방 하나 가졌다는 것은
삶이 나에게 준 얼마 안되는 행복감중에 하나다.

아, 그러고 보니 잊은 게 있다. 내 빨간 작은 차.
그 빈 차에도 인사하고 와야겠다.
"잘 있었니?" 라고.


** 11년 전 일기를 들춰보다가 뽑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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