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전람회 : part 1   

2009. 6. 6.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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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 DSLR을 구입한 후에 지금까지 많은 사진을 찍었지요.
찍을수록 어렵네요.
대표작이라고 말하면 우습고,
개중 가장 잘 나온 사진을 블로그에 전시합니다.

우선 2006년의 사진을 part 1으로 먼저 올립니다.
2007년과 2008년 사진은 나중에 천천히 올리겠습니다.

지난 사진을 들춰보면,
그때의 기억과 풍경의 냄새가 함께 살아납니다.
사진이 주는 선물이겠지요.

(사진이 좀 많습니다. 천천히 보세요. ^^;)
(크게 보려면 클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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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아마추어, 노무현   

2009. 6. 5.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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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한나라당을 위시한 보수 야당들과 보수언론들은 '아마추어에게 나라를 맡겨서 위험하다'고 비판의 각을 세웠다. 그들의 노회한 눈에는 환갑도 안 된 젊은 나이인데다가 국회의원과 지자체 단체장 선거에 매번 낙선만 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우스워 보였을 게다.

지금에야 대부분의 국민들이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안타까워 하지만, 당시엔 많은 이들이 그들의 비판에 동조한 게 사실이다. 뒤늦은 후회지만 반성할 일이다.

아마추어(amateur)란 단어는 어떤 뜻일까? 우리는 보통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난 아마추어라서 별로 실력이 없어요.", "아마추어 밖에 안되는 놈이었냐?"라고 남을 탓하거나 자신을 변명하는 말로 흔히 쓰인다. 프로(Professional)보다 전문성에서 뒤떨어지는 풋내기나 신참, 또는 관심은 있으나 돈을 추구하지 않는 동호인으로 아마추어란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아마추어란 단어의 어원을 따져본다면, '덜 떨어지는 자'에게 함부로 아마추어라 명명하지 말아야 함을 느끼게 된다. 아마추어는 '사랑한다'라는 뜻의 '아모르(Amor)'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단어다. 아마추어란 즉 '무언가를 사랑하는 사람',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런 좋은 의미의 말이 '풋내기'를 뜻하는 좁고 부정적인 뜻으로 더 많이 쓰이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맞다. 노무현은 아마추어였다. 그가 임기 중에 내놓은 톡톡 튀는 행동과 제안은 그가 대한민국과 국민을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이 없었더라면 나오기 힘들었다. '검사들과의 대화', '권위주의 타파', '대통령의 정치적 중립 재고', '대연정 제안', '행정도시 이전' 등의 행동과 정책들이 그렇다.

보수정당의 거센 조롱과 반발, 뒤를 이은 국민들의 외면으로 그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고 끝내 '조직적 냉대' 속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진정성은 이제서야 인정 받고 있다. 그가 떠난 뒤에야 그가 얼마나 대한민국을 새롭게 이끌기를 소망했는지, 그리고 국민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느꼈기 때문이다. 

뒤를 이어 그 자리에 오른 자는 스스로를 경제 전문가라 지칭한다. 자신이 프로라고 말한다. 그가 낸 성적이 형편 없지만, 그렇게 인정 받길 원한다면 '프로 대통령'이라 칭해 주련다. 그러나, 아마추어라는 아름다운 호칭을 패찰하겠다고 나선다면 결단코 반대하리라. 진정 나라를 사랑하는가? 진정 국민을 사랑하는가?

누군가가 고인을 아마추어라고 비난하면, 그렇다고 당당히 대답할 일이다. 영결식이 끝난지 1주일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오래 전 일 같이 아득하다. 영원한 아마추어, 노무현. 그의 열정과 사랑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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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Twitter)를 시작하다   

2009. 6. 5.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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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부터 트위터(twitter)를 시작했다.
처음엔 어떻게 하는지, 헤맸는데
이제야 조금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20대 때는 나름 IT에 강했는데,
요즘에 여기저기에 생기는 트렌디한 서비스를 따라가기가 조금 버겁다. -_-;
나중에 나이 많이 들어서 소일거리라도 마련하려면
열심히 catch-up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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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 twitter의 username은 @in_future 입니다.
저를 많이 따라와(follow) 주세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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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게으를 자유를...   

2009. 6. 3.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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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콩다방에서, 또 한번은 별다방에서 커피를 마시며
못 그리는 그림을 또 끄적거려 보았다.
볼펜으로 그리니 한번 어긋나기 시작하면 끝장이다.
인생도 그러할까?

한없이 게을러도 죄책감 한 점 느끼지 않을
단 1분의 시간은 왜 쉬 허락되지 않을까?

이제 여름인데,
금년엔 무얼 했는지 돌아본다.

어이쿠!
별것 없구나!

콩다방에서

별다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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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이란 말, 쓰면 안되나?   

2009. 6. 3.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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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모 대학에서 열린 포럼에 패널로 참석했다. 인문학적 소양을 함양하기 위해 대학교육이 나아갈 방향을 '통섭'의 관점에서 논의하는 자리였다. 과학의 관점에서 경영학을 바라본 '경영, 과학에게 길을 묻다'의 지은이인 덕에 작년에 이어 패널로 참여했다.

여러 패널들(나를 포함한)은 각기 다른 관점에서 의견을 제시했으나, 현재까지의 이공계 교육이 창의성과 분석력, 그리고 실행력을 함양하는 데 부족하다는 점과, 대학교육이 지식이 아니라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데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는 점이 공통된 의견이었다.

이 포럼에는 저술가로 유명한 분이 기조연사로 초청됐는데, 패널들의 발표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내내 불편한 얼굴로 무엇인가를 메모했다. 알고보니 이유인 즉 '통섭'이란 용어 때문이었다. 나도 '통섭 교육에 대한 제언'이란 제목으로 발표를 했으니 상당히 못마땅하게 여겼으리라.

그분은 패널들의 발표가 다 끝나고 발언권을 신청하더니 앞으로 나와 이렇게 말씀하셨다.

"통섭이란 말은 쓰면 안 됩니다. 통섭으로 번역한 consilience란 단어는 미국에서 이미 죽은 말, 사어(死語)입니다. '통섭'은 원효대사의 말에서 차용했다고 하는데, Pressian(프레시안)에 김지하 씨가 쓴 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절대로 쓰면 안 되는 말입니다."

대략 이런 의미의 발언이었다('통섭이란 말을 쓰면 무식한 사람입니다'라고 한 것 같은데 확실하지 않다). 화가 좀 났는지 그분은 위의 말을 여러 번 반복하고는 급히 퇴장하셨다. 지금까지 통섭적인 교육이 필요하다는 논조로 진행된 포럼이었는데, 짧은 시간이었지만 회의장은 찬물을 끼얹은 듯 멍한 분위기였다.

설령 '통섭'이란 말이 써서는 안 될 용어라 할지라도 좀 심했다 싶다. 그리고 비록 자기 생각과 다른 의견이 개진됐다해도 포럼 말미에 보인 그분의 행동은 참가자 모두를 '뻘쭘'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집으로 돌아와 그분이 지적한 김지하 시인의 글을 검색해서 읽어봤다.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면 프레시안의 기사가 뜬다.

최재천ㆍ장회익 교수에 묻는다 (프레시안 2008년 10월 8일자)

'휴우... 왜 이렇게 길어?' 억지로 꾸역꾸역 끝까지 읽었는데 솔직히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독해력과 교양이 부족한 탓이라 여겨 한번 더 읽었는데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도통 되지 않았다. 현학적이고 난해하며 생전 처음 보는 단어들이 난무하는데, 범인인 나는 김지하 시인이 어떤 논리로 통섭이란 말의 사용을 금하는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줄기차게 나열된 의문문들, '네가 뭘 알아?'식의 문장들, '공부하라'식의 충고들도 읽기 불편했다. 그게 김지하 시인의 스타일일지 모르겠으나 독자를 배려하지 않는 난독체(難讀體)의 문체에 질려 버렸다. 포럼의 '그분'은 왜 김지하 시인의 글을 읽어보라고 한 걸까? 고개가 갸웃거리다 못해 푹 꺾인다. 김지하 씨의 아드님이 '시를 좀 쉽게 쓰라'고 충고한 이유를 알 듯하다. 김지하 씨의 논거는 각자 파악하기 바란다.

하여간, 이화여대 최재천 교수가 통섭이란 말로 번역한 consilience란 단어가 미국에서 이미 죽은 말이라고 해서 우리가 그걸 쓰지 말아야 할까? 사어를 들여와서 우리나라에서 새로운 개념을 덧대어, 혹은 다른 의미로 변화시켜 쓰면 안된다는 법이 있을까? 오히려 자기네 사어를 살려내어 잘 쓰니 칭찬 받아야 할 일 아닌가?

고유한 문화란 없다. 남의 문화가 우리 문화와 서로 섞이다가 새로운 것이 창조되기도 하고 서로 경합하다가 어느 하나만이 생존하기도 한다. 남의 나라에서 쓰이는 규칙을 우리가 준수해줄 의무는 없다. '통섭'이란 말의 기원이 어떻든, 또 그게 사어이든 아니든,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학제간 융합을 의미하는 용어로 널리 쓰인다면, 우리가 채용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축제용 폭죽으로 쓰이던 중국의 화약을 유럽에서 무기용으로 썼다고 해서 비난할 수 있을까? 본래 중국음식이 아니기 때문에 짜장면을 만들지도 먹지도 말아야 할까? 단어의 의미도 마찬가지다. 여러 나라를 건너다니면서 변화하기 마련이다. 우리 식대로 체화됐다면 쓰지 못할 이유가 없다. 사어라며 쓰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논거가 옹색하다.

Consilience의 저자인 에드워드 윌슨은 생물학을 중심해 놓고 나머지 학문들을 줄세우고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렴풋이 김지하 시인의 글을 추리(맙소사 추리까지 해야 하다니!)하면, 그가 그토록 통섭이란 단어에 불편을 느낀 이유는 바로 '생물학 중심'의 통섭을 윌슨이 주장했기 때문인 듯하다.

나 또한 생물학이 가운데의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는 윌슨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윌슨이 평생 연구한 분야가 생물학이기 때문에 '자기중심적 결론'에 도달한 거라고 너그럽게 이해하면 될 일이다. 윌슨이 생물학 중심 사상을 포기만 한다면 그의 Consilience론은 이 시대에 화두가 될만한 훌륭한 담론이다.

이미 통섭은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의미의 공감대'를 형성한 용어가 됐다. 분편화되고 단절된 학문들을 가로지르고 엮어서 새로운 지혜를 얻자는 사회운동으로서 통섭은 이미 하나의 지향점을 획득했다. 통섭. 이 단어의 출신성분을 따져서 '쓰고 안 쓰고'를 정할 일이 아니다.

김지하 시인은 서양의 사상이 제일인 양 떠들다간 지적(知的) 식민지 꼴을 못 벗어난다고 일갈한다. 우리 고유의 사상이 더할나위 없이 좋다면, 좀 쉽게 써주길 바란다. 그래야 많은 이들이 이해라도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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