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 보면서 결정하겠다'란 말은 하지 마세요   

2024. 4. 17. 08:00
반응형

 

세상이 급변하고 있습니다. 절대 상투적인 말이 아닙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아직 진행 중이고, 이스라엘과 중동 국가들 사이의 무력 분쟁이 어떤 양상으로 흘러갈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북쪽에서 늘 우리를 위협하는 북한의 존재는 상수이지만, 그들이 작금의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어떤 변수를 내세울지 모릅니다. 언젠가 파국으로 치달을 기후 위기 역시 주요 위협 중 하나입니다.

이렇게 미래가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상황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기회를 미루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제품의 출시 시기를 재빼르게 결정하기보다는 일단 출시를 미루고 상황을 보면서 출시 시기를 정하자고 결정내리기 쉽죠. 

여기서 '상황을 지켜보자'는 말은 결정을 하지 않고 기다리면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거나,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상황이 전개될 수 있거나, 자연스럽게 불확실성이 해소되리라는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기대는 기대일 뿐, 기대한다고 해서 진짜로 그리 되지는 않습니다. 

실은 이렇게 급변하고 위협적인 상황에서는 결정을 빨리 하는 게 유리할 수 있습니다. '기회의 창'은 기다려주지 않으니까요. 축구에서 공을 잡은 공격수가 바로 슛을 해야 하는데 좀더 좋은 각도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면 어떻게 될까요? 바로 상대편 수비수에게 막혀 버리고 맙니다. 저는 의사결정 실패의 대부분은 의사결정 내용이 나빠서라기보다 의사결정 시기를 놓치는 데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비근한 예로, 의정 갈등 문제 해결에 정부가 차일피일 결단을 미루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떠올려 보세요.)

 



이렇게 의사결정을 하지 않으면서 덧붙이는 대표적 변명은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그럴 듯한 변명으로 들립니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유연하다'라는 말의 정의부터 올바르게 해야 합니다. 저는 유연함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한 가지 안에 얽매이지 않고 여러 개의 대안을 미리 확보해 두고 특정 대안을 차별하지 않으면서 의사결정하는 것"

체조선수의 몸은 상당히 유연한데요, 그들의 유연함이란 '가능한 한 많은 형태(즉 대안)에 자신의 몸을 위치시킬 수 있다'는 뜻입니다.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라는 변명이 신빙성이 있으려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여러 개의 대안을 미리 마련해 두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조건이 형성되면 어떤 대안을 선택하겠다는 계획 역시 수립해 둬야 합니다. 그래야 의사결정의 적기를 잡을 수 있죠. 

어떻습니까? 유연함이란 그냥 앉아서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체조선수들이 몸의 유연함을 높이려고 모진 훈련을 감내하는 것처럼, 유연한 의사결정을 하려면 부단한 고민과 계획과 수정이 뒷받침돼야 합니다. 별다른 노력없이 의사결정을 미루기만 하면서 '상황을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라고 말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언어도단이니까요.

그래도 의사결정을 연기하면 여러모로 안전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네요. 아무것도 안 하면 손실이 생기지 않는다고 여기면서 말이에요. 그러나 구성원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허둥대면서 발생하는 비용은 어떻게 하려고요? 그리고 의사결정 사안을 둘러싼 이해관계자들로부터 신뢰를 잃음으로써 발생하는 손실은 또 어떻게 막을 생각입니까?

환경 변화가 빠르고 위험하면 의사결정도 그 속도에 맞춰 빠르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좀더 상황을 지켜보고...'란 변명은 통하지 않습니다. 그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것과 같은 뜻이니까요. 그리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조직(국가를 포함한 모든 조직)에는 미래가 없는 법이니까요.



유정식의 경영일기 구독하기 : https://infuture.stibee.com/

반응형

  
,

<삼체>에서 발견한 권위주의의 포악성   

2024. 4. 16. 08:00
반응형

 

요즘 넷플릭스에서 <삼체>라는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물리학에서 난제로 일컬어지는 '3 Body Problem'을 소재로 한 SF인데요, 여러분의 이해를 위해서 '삼체 문제'가 무엇인지 간략하게만 설명하겠습니다.

삼체 문제란 질량을 가진 세 물체의 인력에 따라 각 물체의 운동 주기와 거리가 어떻게 될지를 계산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태양계에는 오직 한 개의 별(태양)이 있고 그 별 주위로 8개의 행성이 공전을 합니다. 태양계에서 태양이 차지하는 질량이 매우 크기에(99.86%) 태양과 각 행성과의 관계는 '이체 문제'라고 불리고 천재 수학자이자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이 정리한 깔끔한 수학식으로 풀 수 있죠.

하지만 만약에 태양계 내에 태양과 같은 별이 하나 더 존재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되면 우리 지구의 공전 주기를 계산하기 어려운 상태로 빠집니다. 태양 1과 태양 2에 사이에 놓인 지구의 공전 주기가 어느 때는 1년보다 짧았다가 또 어느 때는 더 길어질 수 있죠. 또한 지구가 태양을 타원으로 돌던 궤도 또한 엉망이 되어 버립니다. 각 태양과 아주 가까워져서 지구 상의 모든 게 불탈 수도 있고, 또 너무 멀어져서 빙하기보다 심각한 상태가 될 수도 있죠. 문제는 언제 어느 정도로 궤도가 변할지 계산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뉴턴은 이런 골치아픈 삼체 문제를 풀려고 평생 애를 썼지만 끝내 실패했습니다. 결국 수학자 푸앵카레에 의해서 삼체 문제의 '해(solution)'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중에 증명됐죠(푸앵카레는 삼체 문제를 이체 문제로 단순화시켜서 '특수해'를 구하는 방법을 제시했을 뿐입니다.) 한마디로, 삼체 문제는 '풀 수 없는 문제'입니다.

 



<삼체> 드라마에서 외계에 전파를 발사하여 외계 문명을 찾으려는 프로젝트가 나오는데요, 전파를 증폭시키는 데 기술적 한계가 있기에 어딘가에 있을 외계인들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태양을 거대한 전파 반사판으로 사용하면 엄청난 크기로 전파를 증폭시킬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전파를 태양으로 직접 쏘면 그걸 태양이 반사하여 훨씬 강하게 먼 곳까지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던 거죠(이제 실제로 가능한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주인공은 독재자 마오쩌뚱이 지배하던 중국의 여성 엔지니어였습니다. 칭화대에서 물리학을 배우다가 문화혁명의 피바람으로 어찌어찌해서 강제노역을 하다가 또 어찌어찌해서 전파 천문대에서 일하게 되었죠(자세한 스토리는 스포일러일 테니 생략합니다). 

이 드라마의 주요 배경 중 하나가 1960~70년대의 중국임 배경임을 이야기한 이유는 당시 중국에서 마오쩌뚱은 인민의 태양이라는 호칭으로 불릴 만큼 신격화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천문대장은 주인공의 요청을 단칼에 거부합니다. 태양에 정면으로 전파를 쏜다는 것은 마오쩌뚱의 존엄을 위협하는 불경한 짓이라는 게 거부의 이유였습니다. 태양을 거대한 증폭기로 사용한다는 매우 참신하고 놀라우며 '손쉬운' 아이디어가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거부 당한다는 게 어이가 없더군요. 

'고작 인민의 태양이라는 은유적 표현이 실제의 태양을 무시해 버릴 만큼 강력한 것인가?'  

이 장면을 보면서 권위주의가 시대의 발전과 혁신을 막고 오히려 후퇴시키는 주된 원인이라고 새삼스레 느껴지더군요. 비록 픽션이라지만 중국 작가의 작품이기에 당시 마오쩌뚱 치하의 '권위주의 포악성'을 이 장면으로 잘 캐치했을 겁니다.  무자비한 희대의 비극과 폭력을 문화혁명이라는 당의정으로 포장할 만큼 마오쩌뚱을 위시한 위정자들은 무지하고 무도했고, 그놈의 문화혁명으로 중국은 몇십 년 뒤로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조직이 가야할 올바른 길보다 윗사람 심기를 살피는 것이 최우선인 조직에서 희망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주인공은 몰래 외계에 메시지를 보내 지구를 침공할 것을 요청합니다. 우리 세상은 희망이 없다는 말과 함께.

지금 우리에게 희망이 있을까요?

 


유정식의 경영일기 구독하기 : https://infuture.stibee.com/

반응형

  
,

이번 총선을 보며 든 몇 가지 생각   

2024. 4. 15. 08:00
반응형

 

올해 초부터 시작된 '총선' 정국이 종료됐습니다. 여느 유권자처럼 저 역시 선거철이 되면 '정치 고관여' 상태로 전이되어 안 보던 정치 토론 프로나 각종 유튜브 채널을 일부러 챙겨보곤 하는데요, 투표도 하고 결과도 봤으니 이제는 일상에 보다 집중해야겠습니다.

이번 총선 과정을 보면서 제가 느꼈던 몇 가지 생각을 '짧게' 정리해 보렵니다. 자세히 서술하면 자칫 정치 성향을 드러낼 수 있기에 일부러 중립적인 어조로 짧게 서술한다는 점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고 가설일 뿐이라는 점도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실제로는 몇 가지 더 있는데, 중립적인 생각만을 공유합니다)


1. 손짓과 표정 등 비언어적 표현을 조심해야 한다
말로 속마음을 감추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감춰진 속마음은 자기도 모르게 손짓이나 표정 등 바디랭귀지로 튀어나오려는 속성이 있나 봅니다. 조심한다고 해서 막을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속마음부터 진정성이 있어야 그런 이상한 손짓이나 표정, 말투가 나오지 않습니다.

2. 승리하려면 '중도층'을 투표장에 나오게 해야 한다
중도층에는 보수적 중도와 진보적 중도가 섞여 있는데, 보통은 투표 의지가 적습니다. 정치 저관여층이라고 말할 수 있죠. 이들을 투표장에 나오게 할수록 승리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이들을 투표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그것은 각 정당의 일.

3. '밴드웨건' 전략보다 '언더독' 전략이 효과적이다
밴드웨건은 '우리가 대세다'를 알림으로써 지지자들의 투표를 독려하는 것이고, 언더독은 '우리가 질 것 같다'라고 지지자들에게 읍소하는 것입니다. 둘다 선거 전략으로 자주 쓰이지만 각 전략에는 부작용이 존재합니다. 밴드웨건 전략을 쓰면 '내가 투표 안 해도 이기겠지'란 생각에 투표할 동인이 적어지고, 언더독 전략을 쓰면 '내가 투표해봤자 안 될 텐데'란 생각에 역시나 투표하기가 싫어지죠.

그런데 이번 총선을 보니(지난 여러 번의 선거에서도 마찬가지인 듯), 밴드웨건 전략을 쓰면 부작용이 커지는 반면에 언더독 전략을 쓰면 지지층이 결집해 투표장에 나가는 현상이 엿보였습니다. 우리 민족이 극난 극복의 후손이라 그런 걸까요? 중도층을 투표장에 이끄는 데에도 언더독 전략이 효과적인 것 같습니다.

4. 여론조사를 믿기 어렵다
여론조사가 여론을 조작하고 호도하는 모습이 평범한 시민인 저에게도 보일 정도입니다. 여론조사가 있는 그대로의 표심을 반영해야 하는데, 밴드웨건 전략이나 언더독 전략의 전술로 이용되는 것 같습니다.

5. 전문가의 예측 역시 믿기 어렵다
4번과 같은 이유로 그렇습니다. 얼토당토하지 않은 예측을 내놓은 정치평론가들은 왜 계속 방송 매체에 출연하는 걸까요?

6. 출구조사 때 거짓으로 답하는 사람이 꽤 많다
출구조사 결과가 개표 결과가 완전히 딴판으로 나온 경우가 꽤나 많았습니다. 통계 오류는 아닙니다. 거짓으로 응답한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는 게 제 가설입니다. 그렇다면 왜 거짓말을 하는 걸까요? 그저 장난으로? 보수 유권자와 진보 유권자 중 누가 더 거짓말을 많이 하는 걸까요? 여러모로 궁금합니다.

7. 이기고 있다가 지는 게 더 고통스럽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계속 지는 것'보다 '이기고 있다가 마지막에 지는 것'이 더 고통스럽고 납득하기 어렵다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처음부터 없는 것보다 '있다가 없는 것'이 더 아쉽듯이.

당선자들께는 축하를(그리고 준엄한 책임감을),
낙선자들께는 따뜻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유정식의 경영일기 구독하기 : https://infuture.stibee.com/

반응형

  
,

심플한 경영, 심플한 리더십   

2024. 4. 12. 08:00
반응형

 

최근에 제가 번역한 책 '무기가 되는 알고리즘'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제목에 '알고리즘'이라는 단어가 포함돼 있어서 IT 관련 책이 아닌가 오해할 것 같은데, 사실은 리더가 하루에 하나씩 실천해야 할 것을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리더십 책에 가깝습니다. 

당초 '옮긴이의 글'을 책에 싣기로 했으나 출판사측이 편집 단계에서 게재하지 않기로 결정했는데요, 그래도 이 책을 선택하는 데 참조하십사 하는 마음으로 여기에 공유합니다. 



---------



20여년 전에 나는 외국계 컨설팅 회사를 다니다가 ‘1인 컨설팅 사’로 독립했다. 그때 나는 여러 기업이 겪고 있는 ‘시스템 과부하’ 증상을 해소하는 것을 나의 미션으로 삼았다. ‘Not Plus, But Minus. 직역하면 ‘더하지 말고 빼자.’ 문제를 해결하고 효율을 높인다는 취지로 도입된 각종 시스템과 제도가 생산성과 성과를 향상시키기는커녕 직원들이 자유롭게 활동하지 못하도록 족쇄가 된다든지, 그 복잡성 때문에 눈앞의 단기 성과에 매몰되게 만든다든지, 단순하게 접근해도 되는 문제에 복잡한 분석을 들이대는 바람에 오히려 문제 해결을 어렵게 한다든지 등 문제가 심각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렇듯 ‘Not Plus, But Minus’는 경영 시스템이 복잡해지는 것을 경영의 고도화 혹은 과학화라고 오해하는 분위기를 깨야겠다는 나의 신조가 담긴 문구였다.

“평가제도를 없애라.” 나는 CEO나 인사담당자들을 만날 때마다 이 말을 주저없이 던졌다. 직원을 평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평가를 해야 연봉을 결정할 수 있는데, 평가를 없애라니 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싶었을까? 상대는 늘 놀란 눈을 하며 이유를 물었다.

평가를 없애라는 내 ‘공격적 제안’에 워낙 반발이 심했기에, 그리고 예상 질문이 거의 비슷했기에 반격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나는 평가를 없애야 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연구 논문으로 검증된 결과들을 제시하며 평가제도가 일으키는 다양하고 심각한 문제를 지적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듣던 상대는 내 설명이 다 끝나면 십중팔구 이렇게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평가를 없애면 그 대신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 질문의 기저에는 ‘평가를 없애면 직원들이 일을 안 할 것이다.’라는 우려가 깔려 있었다. 직원들이 열심히 일하도록 무언가 강제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으니까. 대안을 달라는 뜻인데, 나는 짐짓 모른 척 하면서 이렇게 대꾸하곤 했다. “평가를 없애면 됐지, 또 뭘 하려고 하세요?”라고. 그러면 상대는 아까보다 더 깊이 미간을 찡그렸다. 속으로 ‘이 사람이 장난하나?’ 싶었을 것이다. 나는 잠깐 침묵을 유지하다가 상대에게 평가를 없앴을 때의 대안을 차근차근 제시했다. 물론 먼저 평가를 없앤 타사의 사례를 들어가면서.

하지만 나는 자괴감을 자주 경험했다. 그렇게 자세히 설명하고 타사 사례를 들어가며 이해를 시켜도 이미 화석처럼 박힌 제도를 없애려고 시도한 회사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평가의 대안을 제시해도 평가만큼의 강제성과 압박이 없다는 이유로 ‘까이기’ 일쑤였다. 상시 피드백을 통해 직원의 성과 창출 과정을 꾸준히 모니터링하고 지원해야 하는 것이 점수 매기듯이 1년에 한두 번 평가하는 제도보다 훨씬 근본적이고 효과적이라는 나의 주장은 효율과 일괄 조치를 좋아하는 경영자들에게 잘 먹히지 않았다. 경영의 복잡성을 해제하고 ‘심플’한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담론에 다들 동의하면서도 정작 실행은 주저하고 ‘그래야 하는 이유’를 너무나 따져 묻는 경영자들이 꽤나 많다는 데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책을 번역하면서 종종 드는 생각이 있는데 바로 ‘그때 이 책을 알았더라면….’라는 아쉬움이다. 이 책 ‘비즈니스 메이드 심플’이 그때 나왔더라면 ‘더하지 말고 빼라’는 나의 ‘고독한’ 외침을 든든히 지지해 주었을 텐데. 하지만 지금이라도 이 책이 나온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이다. 업계를 돌아보면 많은 기업들이 복잡한 시스템의 무게에 짓눌려 있음을 깨닫고 경영의 기본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점차 주류가 되고 있다. 내가 욕을 먹어가며 줄기차게 외친 ‘평가를 없애라’는 주장이 이제 인사관리의 메인 테마 중 하나가 됐다는 게 단적인 예다. 이런 분위기 하에서 이 책은 리더들을 ‘심플’한 경영의 기본으로 돌아가도록 돕는 가이드로서 역할을 충분히 수행할 것이다.

이 책은 리더 본인의 마인드 전환과 정립뿐만 아니라 마케팅, 연구, 영업, 협상 등 경영 전반의 기본을 망라한다. 하루에 한 꼭지씩 60일간 읽으며 실천해가는 구성이 참신하고 ‘심플’하다. 저자는 이 책을 몇 번이고 꼼꼼히 읽는다면 경영대학원에 지불해야 할 수천만 원의 등록금을 아낄 수 있다고 장담한다. 과장이 살짝 심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만큼 ‘심플’한 경영의 기본을 잘 다지고 반복 실천하는 것이 경영대학원에서 복잡한 경영 이론을 배우는 것보다 훨씬 유용하고 값지다는 점에서 저자의 주장에 동의한다.

지면을 빌어 저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저자가 이 책에서 제시한 미션 수립 프레임워크로 모 회사에 미션 재정립 제안서를 제출해 프로젝트를 수주할 수 있었다. ‘히어로’의 여정으로 미션 수립 과정을 설명한 것이 클라이언트 측에 참신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이 책이 매우 실용적이란 말에 이보다 강력한 증거가 있을까 싶다. (끝)


유정식의 경영일기 구독하기 : https://infuture.stibee.com/

반응형

  
,

'취약한 리더'가 훌륭한 리더입니다미리보기   

2024. 4. 11. 08:00
반응형

 

제가 영어 원문을 번역할 때마다 “도대체 한국말로 어떻게 번역해야 되지?”라는 단어가 종종 튀어나오는데, ‘vulnerability’도 그 중 하나입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취약성'이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는 언뜻 부정적인 느낌을 줍니다. 

그런데 리더에게 필요한 여러 요소 중 취약성이 꽤 중요하다는 말이 리더십 관련 글에 자주 등장하곤 합니다. '리더에게 필요한 게 취약성이라고? 왜지?' 리더라면 취약하지 않은 사람이어야 하고, 취약한 사람은 리더의 자질이 없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게 상식 아닌가 해서 처음엔 굉장히 의아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vulnerability은 ‘약점 투성이’ 혹은 ‘실수나 실패’, ‘위험’이라는 뜻이 아니더군요. vulnerability은 ‘내가 완벽하지 않은 사람임을 인정하고, 나의 취약함을 상대방에게 보여줄 수 있는 용기’를 의미합니다.  그만큼 자기객관화를 잘 할 줄 알고, 상대방을 존중할 줄 알며, 약자에게 겸허한 자세로 임한다는 뜻이죠.

 



소위 “나 때(‘라떼’)는 말이야"를 접두어로 붙이며 이야기를 시작하는 사람을 종종 접하곤 하는데, 안 해 본 것이 없고 못 해 본 것이 없는 그들에게는 상대방이 '늘' 미숙하고 부족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왜 이리 못난 애들만 자기 주위에 있는지 분통을 터뜨리죠.

하지만 이렇게 ‘절대 취약할 리 없는 완벽한’ 리더를 누가 믿고 따르겠습니까? 그런 리더가 다른 조직으로 옮길 때 “저도 데리고 가 주세요.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직원이 과연 있을까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리더는 그저 두려울 뿐, 절대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은 법입니다.

제가 리더들에게 “닮고 싶은 리더는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하면 항상 나오는 대답이 ‘이순신 장군’이더군요. “왜 이순신 장군입니까?”라고 물으면 대략 “모든 것이 완벽한 리더”라는 식으로 대답합니다.

틀린 점 2가지를 지적하고 싶네요. 첫째, 사실 이순신은 완벽한 리더가 아니었습니다. <난중일기>를 읽어보면 이순신처럼 ‘취약한’ 리더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 겁니다. 그는 자신의 고충을 부하 장수들에게 털어놓고 도움을 구했던 리더였거든요. 결코 모든 전략과 계획을 완벽하게 세우고 부하들에게 일사불란하게 수행할 것을 ‘하달하는’ 리더가 아니었습니다. 

둘째, 완벽한 리더를 지향하다가는 고립된 리더가 될 뿐입니다. 무엇이든 틀릴 수 없고, 감정이 흔들리지 않으며, 늘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자로 스스로를 포지셔닝하면, 틀렸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감정을 숨기려다가 갑자기 폭발하며, 직원들의 비이성적 행동을 결코 용납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는 사이, 직원들은 하나 둘 등을 돌리겠죠.

취약한 리더는 겸손한 리더이고, 경청하는 리더이며, 포용하는 리더이고, 협업하는 리더이며, 성공을 함께 나누는 리더입니다. 완벽한 리더가 되려는 노력은 부질없고 모두에게 해로운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혹시나 이번 총선에 뽑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여러 후보들 중 가장 '취약한 리더'에게 표를 주는 게 어떨까요? 자신은 완벽하다고 외치는 리더 말고요. (이 글은 총선 전에 썼습니다)

 

 

유정식의 경영일기 구독하기 : https://infuture.stibee.com/

반응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