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은 사실 굉장히 위험한 도박입니다   

2024. 10. 1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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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직전, 독일과 소련은 상호불가침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 조약은 서로에게 윈-윈이었어요. 독일은 서부유럽(프랑스, 영국 등)을 공략하는 것이 최우선이었기에 등 뒤에 있는 소련과 화친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고, 소련은 이제 막 혁명을 완성한 후라서 낙후된 경제를 살리는 것이 국가적 현안이었기에 전쟁을 벌일 여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19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하루아침에 조약문은 휴지조각이 되었고, 파죽지세로 달려드는 독일의 공격으로 초기의 소련군은 추풍낙엽처럼 쓸려 나갔습니다. 

이를 보고 많은 이들은 소련이 불가침 조약만 철썩 같이 믿고서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초기 패배의 원인을 진단합니다. 당시 최고의 권력자인 스탈린이 상황 판단에 크게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말이죠. 하지만 진짜 그럴까요?

독일이 전쟁 준비를 착착 진행 중이라는 사실은 당시 누구나 알고 있었습니다. 독일이 베르샤유 조약의 무효를 선언하면서 징병제를 도입했고 벨기에 쪽으로 군대를 전진 배치했으니 설령 국민들은 알지 못했다 해도 스탈린 같은 위치에 있는 자가 독일의 침략 가능성을 모를 리 없었습니다. 독일이 침공하기 전인 1935년부터 1939년까지 소련은 나라의 곳간이 텅비었음에도 불구하고 무기 구입을 위해 다른 국가보다 훨씬 많은 돈을 지출했습니다. 이것이 독일이 전쟁을 일으킬 것임을 미리 알았다는 확실한 증거죠.

 



그렇다면 소련은 왜 독일에게 처음부터 ‘깨진’ 것일까요? 가장 큰 이유는 ‘리더십의 부재’였습니다.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최측근에게조차 나누려 하지 않았던 스탈린은 조금이라도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는 자가 있다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무자비하게 숙청하거나 투옥시켰습니다. 군대의 장성들과 고급장교들도 ‘대숙청’에 예외는 아니었죠. 주요 직위가 경험없는 장교들로 채워졌으니 초장에 ‘무참히 깨지는 건’ 당연했습니다. 

소련군이 초기에 고전을 면치 못했던 두 번째 이유는 바로 ‘혁신에 박차를 가했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 것 같은데요, 소련군의 사례를 보면 혁신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점, 혁신을 추진하던 도중 한방에 ‘훅’ 갈 수도 있음을 깨닫습니다.

‘겨울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인 1939년 11월 30일에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함으로써 벌어진 전쟁입니다. 겉으로는 소련의 승리로 끝났지만(1940년 3월 종전), 핀란드를 정복하겠다는 목표는 달성되지 못했고 전쟁 내내 소련군은 핀란드군의 영리한 전략에 끌려다니며 고전했습니다. 

약소국을 상대로 고된 싸움을 벌였던 까닭으로 지적된 것이 ‘군관구’라고 불리는 소련군의 독특한 조직 체계였습니다. 각 지역에 주둔하는 군대로 자체적으로 전략 수립, 전투 수행, 행정, 보급 등을 책임지는 형태가 군관구였는데, 봉건시대의 영주가 자체 군대를 이끌던 때의 습성이 군관구로 이어진 것이었죠.

다른 군관구는 뒷짐 지고 관망한 채 레닌그라드 방면 군관구만이 핀란드와 전쟁을 벌였으니, 군사력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맥을 못 춘 거라고 판단한 소련은 봉건주의적 군 체계를 중앙집권적인 체계로 변화시키는 혁신을 감행했습니다. 1년도 걸리지 않았을 정도로 혁신의 속도는 매우 빨랐는데, 이는 스탈린 1인 독재체제가 가져다 준 장점이라면 장점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시점에 있었어요. 군관구가 폐지되고 겉으로는 중앙군 체계가 수립되었다 하더라도 그 속까지 빠르게 변할 수 있었을까요? 기업의 규모가 크건 작건 인사제도의 방향성을 바꾸고 나면 안정화하는 데까지 적어도 3년이 걸릴 거라고 보는데, 소련군처럼 거대 조직(475만명)의 체계 혁신이 1년 안에 모두 완성될 수 있었을까요? 전략 수립, 보급, 행정 등을 새 체계에 맞추느라 모두가 우왕좌왕하며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말았죠. 군관구를 폐지하고 1년도 안 돼 독일이 쳐들어왔으니 소련 입장에서는 혁신이 되려 악재가 된 셈이었습니다. 

‘가죽 혁(革)’자에 ‘새로울 신(新)’자를 쓰는 혁신이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기존의 가죽을 모두 벗겨내고 새로운 가죽으로 몸을 싼다는 뜻입니다. 가죽을 바꾸는 과정에서 ‘알몸’이 노출되니 병원균과 천적이 공격이라도 하면? 혁신은 매우 위험한 모험입니다. 언제나 장미빛 미래만을 약속하지는 않습니다.


(덧붙이는 글)
소련의 입장에서 다행인 것은 혁신의 효과가 소련군이 독일군을 스탈린그라드에서 몰아내며 전쟁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 1943년에 나타났다는 점입니다. 1940년에 실시한 혁신이 3년 후인 1943년에 효과를 발휘한 걸 보면, 크고 작은 변화가 안착할 때까지 적어도 3년이 걸린다는 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일종의 경험법칙(rule of thumb)입니다. 이 법칙은 혁신 후에 바로 효과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도 같이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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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의 나'가 '지금의 나'를 보며 놀라는 이유   

2024. 10. 1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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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일기 독자라면 '더닝-크루거 효과'라는 말의 의미를 잘 알 겁니다. 예전 일기에서 다룬 심리학 용어이니까요. 모르는 분들을 위해 다시 설명하면, 실력은 별로 없으면서 혹은 아는 건 조금밖에 없으면서 자신감은 하늘을 찌르는 심리가 바로 ‘더닝-크루거 효과’입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라는 우리 속담과 궤를 같이 하죠.

더닝-크루거 효과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남들에게 '질문'할 줄을 모릅니다. 본인이 척 보면 안다고 자신만만하니 질문할 이유가 없는 것이죠. 질문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다. 여전히 '고만고만한' 지식의 울타리 안에 머물면서 성장하지 못하겠죠. '모르는 게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니까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법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더닝-크루거 효과가 미약해지는 때가 오는 법입니다. 해당 분야를 조금씩 알아가면서 혹은 같은 분야의 다른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구나'는 인식하기 마련이죠. 이런 깨달음이 빨리 오느냐 늦게 오느냐의 문제일 겁니다. 모르는 게 많다는 것을 깨달으면 이때도 남들에게 질문하기가 두려워집니다. '넌 그것도 모르냐! 멍청하게시리.'고 남들이 흉을 볼까 두렵기 때문이죠. 혹은 남의 시간을 뺏는 것은 아닐까, 지나치게 미안해 하기 때문입니다. 

 



질문하기를 두려워 하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배움이 이루어질 수 없겠죠. 배움이 없으니 성장이 없고, 성장이 없으니 전문가 수준에 오르는 시간이 더딜 수밖에요. 

무언가를 배워가는 초기에는 질문이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질문을 하지 않으려는 기제가 작동합니다. 이를 매순간 상기해야 여러분이 각자 영역에서 전문가로 보다 빨리 보다 안정적으로 안착할 수 있습니다. 무지를 부끄러워 하지 말고, 매일 자신의 '무지 영역'을 1밀리씩 지워간다는 느낌으로 질문을 던지세요. 

연구에 다르면, 멍청하게 들릴지도 모르는 질문을 던질수록 실제로 똑똑해진다고 합니다.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려는 의지가 클수록 더 빨리 배우고 더 현명한 결정을 내린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아시겠지만, 제가 고장난 워크맨 수리를 취미삼아 하고 있는데, 모델마다 메커니즘이 달라서 수리방법을 도대체 알 수 없을 때가 자주 있습니다. 그럴 때 저는 '이런 것도 모르냐?'라고 비아냥을 들을 각오를 하고 인터넷 카페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배터리를 새것으로 바꾸거나 나사를 조여 보라는 식의 답을 들으면 '어이쿠, 내가 이런 것도 모르다니! 창피해 죽겠군.'이라는 감정이 들기도 하지만, 다음번엔 동일한 실수를 하지 않을 테니 몇 초 창피한 것 치고는 남는 장사라는 뿌듯함이 앞섭니다.

워크맨 수리라는 취미를 본격적으로 시작한지 한 8개월 됐는데 이제 왠만한 워크맨은 두려움 없이 분해 조립할 수 있으니 그리고 수리 성공률이 50%는 넘으니, 만약 작년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꽤 놀랄 겁니다. 이게 다 질문 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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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인 게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2024. 10. 1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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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정신 부담을 덜기 위해 가벼운 글로 시작하겠습니다. 다음의 글을 읽어보기 바랍니다.

길동이는 자기 친구들을 여러 명 집으로 초대했다. 집에 컵이 부족해서 길동이는 컵을 사러 마트에 갔다.

아주 쉬운 문장이라 상황이 바로 머리에 들어올 겁니다. 그렇다면, 아래의 글은 어떻습니까?

길동이는 친구 10명을 집으로 초대했다. 집에 컵이 7개 뿐이라서 길동이는 3개의 컵을 사러 마트에 갔다.

비슷한 상황의 글이지만, 이번엔 아까보다 글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조금 더 걸렸을 겁니다. 모자란 컵의 수, 마트에서 사야 하는 컵의 수를 계산하는 데 자신도 모르게 신경을 썼기 때문입니다. 이는 심리학 실험으로 밝혀진 사실입니다.

연구에 따르면 정확한 정보를 줄 때보다 모호한 정보를 줄 때 사람들은 뇌의 에너지를 덜 쓴다고 합니다. 에너지를 덜 쓴다는 말은 그만큼 '쉽게' 정보를 받아들인다는 뜻이죠. 그리고 정확한 정보를 접할 때보다는 모호한 정보를 접할 때 그 내용에 별로 비판적이지 않다는 게 실험 결과로 밝혀졌습니다. '상대방이 내 말을 별다른 비판 없이 받아들인다'를 '설득'의 의미로 본다면, 모호하게 정보를 전달해야 설득하기가 더 쉽다는 게 이 연구의 의미입니다.

 



좀 의아하지 않습니까? 정보를 자세하게 전달해야 상대방을 설득하기가 용이하다는 것을 상식으로 아는 분들은 고개를 갸웃할 이야기인데요, 왜 그럴까요? 인간은 가능한 한 뇌의 에너지를 '적게' 씀으로써 에너지를 보존하는 쪽으로 진화했기 때문입니다.

 설득을 위해서라면 항상 상대방에게 정보를 모호하게 줘야 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연구에서 우리가 채택해야 할 시사점은 정보를 상세하게 제시할 때와 모호하게 전달할 때를 잘 구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득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가 아닌 것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죠. '정확히 모자란 컵의 수'가 뭐 그리 중요할까요? '컵이 부족해서 마트에 컵을 사러갔다' 정도로 표현해도 충분하죠. 중요한 것은 길동이가 파티를 준비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상대방을 설득하거나 이해시켜야 할 핵심 메시지는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전달하고 그렇지 않은 메시지들은 대략적이고 피상적으로 언급하세요. 독자의 두뇌 에너지를 낭비시키지 않고 핵심 메시지에 집중시켜야 여러분 글의 가독성이 올라갑니다. 

제가 몇 명의 실험 참가자를 대상으로 몇 퍼센트의 결과를 얻었다는 식으로 연구 논문의 데이터를 상세히 언급하지 않는 건 다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일기에 '자전거 탄 남자' 사진(위)을 올린 것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참고논문
Mannaioli, G., Ansani, A., Coppola, C., & Lombardi Vallauri, E. (2024). Vagueness as an implicit-encoding persuasive strategy: an experimental approach. Cognitive Processing,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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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선에 둘러싸여 산다는 공포   

2024. 10. 1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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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제 방을 둘러보니 무선 장치가 꽤나 된다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마우스와 키보드 뿐만 아니라, 휴대용 스피커, 헤드폰, 이어폰 모두 무선입니다. 무엇보다 와이파이부터 제대로 무선이니까요! 찬찬히 세어보니 무선으로 동작되는 기기 수가 15개 이상이었습니다. '언제 이렇게 많아진 거지?' 

이렇게 무선 기기들에 둘러싸인 환경에 살다가 EMP(Electromagnetic Pulse, 전자기 펄스) 폭탄이 떨어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순식간에 모든 블루투스 기기는 먹통이 되고 말 겁니다. 물론 유선 전자기기도 EMP 폭탄에 상당수가 무사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접점’이 있으니 선만 있으면 뭔가 시도해 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블루투스 장치들은 물리적 접점 자체가 없기에 수리나 개조가 유선 기기보다 쉽지 않져. 아니, 불가능에 가깝다고 해야 정확합니다.

줄(wire)이 없기에 시각적으로 깔끔한 이점과 선으로 신체의 움직임을 구속하지 않는다는 장점을 얻는 대신, 우리는 시스템 붕괴의 취약도를 높이고 있는 건 아닐까요? 심각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직 효율이 좋지 않다고 하지만 만약 무선으로 전기를 보낼 수 있는 방법이 가까운 미래에 상용화되고 일상화된다면 좀더 취약한 시스템 조건 하에 놓이겠죠. EMP 폭탄 한 방으로 하루아침에 석기시대로 돌아갈지도 모릅니다.

 

 


몇 년 전, KT 서대문 지사의 화재사고로 연희동을 비롯한 일대 지역의 통신이 마비된 적이 있습니다. 휴대폰과 인터넷은 물론이고 집전화까지 먹통이 된, 그 몇 시간 동안의 ‘블랙 아웃’으로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공포심마저 경험했습니다. TV를 틀어봤지만 인터넷 기반의 IPTV였기에 무용지물이었고, 1970년대에 생산된 아날로그 라디오가 ‘일방향’이나마 내게 세상 소식을 들려주는 유일한 도구였죠. 치밀하게 연결된 사회가 얼마나 취약하고 얼마나 위험한지, 저는 그때 절실하게 경험했습니다.

고도의 네트워크 사회가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는 운전을 하다가도 체감할 수 있어요. 얼마전에 차를 몰고 가다가 횡단보도 앞에 정차했습니다. 초록 신호등이 켜지고 엑셀레이터를 밟는 순간, 오른쪽에서 누군가가 고개를 푹 숙인 채 횡단보도에 들어서는 게 아닙니까? 저는 황급히 브레이크를 밟았습니다. 

한 청년이 스마트폰에서 고개를 떼지 않은 채 저 멀리에서 ‘주변시’로 언뜻 보았을 초록 신호등만 믿고(그리고 본인 발걸음이 그렇게 느릴지 인식하지 못하고) 길을 건너려는 게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 청년은 내 쪽을 슬쩍 보더니 다시 스마트폰으로 고개를 돌린 채 아무렇지 않은 듯 길을 건넜습니다. 이미 보행 신호등이 빨갛게 변한지 오래였는데 말이죠. 다행히 반대 차선의 자동차가 청년을 인지해서 위험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스마트폰 역시 대표적 무선 기기잖습니까! 활동 반경의 제약 없이 언제 어디서든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는 무선의 강점. 그 강점을 누리는 데 따른 ‘비용’은 막대하기 그지없습니다.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니 무선에 둘러싸인 지금이 무척 공포스러워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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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 전에 자료를 배포하지 마세요   

2024. 10. 1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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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회사에서 진행하는 회의는 얼마나 효율적입니까? 짐작컨대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할 사람은 별로 없을 듯한데요, 제 컨설팅 경험상 '회의 시간이 과도하다'라고 불만을 토로한 직원들을 매번 만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조직은 여러 조치를 취하는데요,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곳이 회의 전에 자료를 배포하여 참석자들 필히 그 자료를 읽고 들어오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회의실에 들어와 그제서야 허겁지겁 자료를 훑어보면 그만큼 소중한 회의 시간을 까먹게 될 뿐만 아니라 아젠다와 관련하여 좋은 아이디어를 제시하기도 불가능에 가깝다는 게 이유일 겁니다. 언뜻 보면 좋은 방법 같지만, 저는 이것이 지나치게 이상적인 상황을 가정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참석자들이 회의 시간 전에 아젠다와 관련 자료를 숙지하고 읽는 시간은 어디에서 뚝 떨어지는 공짜 시간이 아닙니다. 그걸 읽느라 자기가 맡은 업무를 옆으로 제쳐 놔야 하고 그 시간은 고스란히 ‘일하지 않는 시간’이 되죠. 겉으로 보이는 회의 시간 자체는 줄어들더라도 어디에선가 그만큼의 시간이 소요돼야 합니다. 그러니 회의 시간이 줄어들었다고(즉 효율이 좋아졌다고)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닙니다. 세상사가 모두 그렇듯,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법이죠.

게다가 회의 주최자가 마음대로 참석자를 지정해 놓고서 ‘회의 참석 전에 자료를 숙지하고 들어오라’고 하는 것은 참석자 입장에서 볼 때는 ‘내 업무와 내 재량에 대한 침범’일 수 있습니다. 

 



제가 그간 회의를 주최해 본 경험을 떠올려 봐도 자료를 다 숙지하고 회의실에 입실한, 정말로 ‘고마운’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자료를 브리핑하는 것으로 매번 회의를 시작하곤 했죠.

회의 전에 자료를 읽고 들어 올 사람이 거의 없을 거라면, 회의실에 들어오고 나서 자료를 읽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요? 사실 이것은 아마존이 채택하는 회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아마존의 회의는 침묵으로 시작된다. 참석자들은 발표자로부터 ‘6페이지로 된 내러티브(narrative) 문서’를 받아 그때부터 읽습니다. 발표자가 앞에 나와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브리핑하는 일반적인 모습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죠. 

‘문서 읽기 시간’으로 부여된 20분 동안 회의실엔 종이 넘기는 소리만 나는, 약간은 괴이하기까지 한 적막이 이어진다고 해요. 참석자들은 꼼꼼히 문서를 읽으며 궁금한 것을 표시하고 메모합니다. 20분이 지나가면, 그때부터 열띤 토론이 벌어지죠. 참석자들은 발표자(문서 작성자)에게 질문을 던지거나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발표자는 쏟아지는 질문을 ‘디펜스’하거나 아이디어를 수용합니다. 아마존의 숱한 히트 상품들은 이런 회의를 통해 탄생했습니다.

의 주최자는 회의 전에 자료를 만들어 배포하려고 애쓰지 마세요. 회의가 열리기 2~3일 전에는 보내줘야 한다는 압박을 받지 마세요. 참석자들은 “자료 숙지하고 회의에 들어오라고 요구하려면 자료를 일찍 보내줘야 하지 않겠소?”라고 핑계를 대겠지만, 장담컨대 대부분은 아무리 자료를 일찍 보내준들 읽지 않습니다! 

미리 보내줄 시간에 자료(혹은 보고서)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활용하는 게 각자의 생산성 측면에서 현명합니다. 그리고 아마존이 그리 하듯이, 회의 시작과 함께 참석자들에게 브리핑하지 말고 그들이 직접 자료를 꼼꼼히 읽게 만드세요. 어때요? 한번 시도해 보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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