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독'을 조금씩 마셔야 하는 이유   

2017. 7. 4.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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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4일(화) 유정식의 경영일기


요즘 모 출판사 측에서 의뢰를 받아 책 한 권을 번역 중이다. 이래 저래 잡다한 일이 많고 몸도 며칠간 좋지 않아서 번역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다. 이번 달까지 끝내야 하는데 과연 끝낼 수 있을까? 어젯밤에 이런 무거운 마음을 안고 단 1페이지라도 번역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책을 펼쳤다. 마침 내가 번역을 시작하려는 부분에 책의 저자들(공저자들)은 자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의 한 장면을 소개하겠다는 말이 나와 있었다. 1987년에 제작되어 우리나라에는 1992년에 개봉된 <프린세스 브라이드 The Princess Bride>라는 꽤 오래된 영화였다. 나도 어디선가 제목은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내용은 생소했다. 


저자들이 좋아한다는 장면은 남자 주인공 웨슬리(Westley)가 버터컵(Buttercup) 공주를 구하기 위해 악당 비지니(Vizzini)와 ‘재치 겨루기(battle of wits)’를 벌이는 상황이었다. 책에 이 장면이 소개되어 있지만 대략적으로 표현돼 있어서 인물들의 구체적인 대사나 표정, 행동을 상상하는 데 제약이 있었다. 책 문장만 가지고 번역해도 되겠지만 좀더 충실한 번역을 하려면 직접 영화 장면을 볼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혹시 유튜브에 나와 있을까? 어, 진짜 나와 있네? 친절하게도 ‘재치 겨루기’에 해당하는 클립만 따로 유튜브에 공개돼 있었다. 스포일러일지 모르지만(좀 오래된 영화라는 핑계로) 영화 장면이 주는 교훈이 커서 여기에 소개할까 한다. 


영화 <프린세스 브라이드> 유튜브 화면 캡쳐



버터컵 공주는 천으로 눈이 가려진 채 악당 비지니 옆에 앉아 있고 웨슬리와 비지니는 테이블처럼 큰 바위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바위 위에는 두 잔의 와인이 놓여져 있는데, 웨슬리는 이오케인(iocaine)이라는 독을 비지니에게 보여주며 인간에게 치명적인 독이라고 소개한다. 그러고는 와인 두 잔을 들고 뒤로 돌더니 독을 잔에 넣는 듯한 시늉을 한다. ‘대체 뭘 하려는 거지?’라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비지니 앞에 와인 두 잔을 다시 놓으면서 웨슬리는 말한다. “자, 어디에 독이 들어있을까? 재치 겨루기가 시작됐다고.”


이후에 비지니는 자신이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이고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은 죄다 범죄자라는 둥, 범죄자들은 남을 쉽게 신뢰하지 않는다는 둥, 그래서 그렇게 쉽게 속을 것 같으냐는 둥, 주저리주저리 말을 쏟아내면서 웨슬리를 떠보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더니 갑자기 “저 뒤에 있는 게 뭐지?”라고 소리친다. 이 말에 웨슬리가 등을 돌리는 사이 비지니는 와인잔을 바꿔 놓는다. 웨슬리 앞에 있던 것을 자기 앞으로, 자기 앞에 있던 것을 웨슬리 앞으로 바꿔치기한 것이다. 


결정을 끝낸 두 사람은 각자의 와인을 동시에 마신다. 웨슬리가 “네가 틀렸다.”라고 말하니 비지니는 고소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네가 등을 돌렸을 때 잔을 바꿔 놓았지”라고 말하며 꽥꽥거리듯 웃는다. 그러다 갑자기 옆으로 쓰러지고 그대로 죽는다. 버터컵 공주는 안대를 풀어주는 웨슬리에게 “비지니가 마신 키 작은 컵에 독이 들어 있었군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웨슬리는 버터컵 공주를 일으켜 세우며 이렇게 말한다. “두 잔 모두 독이 들었어요. 지난 몇 년 동안 이오케인을 먹어도 괜찮도록 면역을 키웠거든요.”


영화 <프린세스 브라이드> 유튜브 화면 캡쳐



저자들이 이 영화 장면에서 초점을 맞춘 부분은 바로 사람의 심리를 역추적해서 알아맞히려는 똑똑함(비지니로 대표되는)보다는 이오케인을 몇 년 동안 조금씩 먹으면서 면역을 키우는 것, 즉 ‘작은 리스크’를 계속 수용하면서 스스로를 단련시키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점이었다. 웨슬리라는 인물은 두뇌의 똑똑함만을 믿을 것이 아니라 평소에 작은 고통을 스스로에게 일부러 주입해야 더 큰 고통이나 위기가 닥쳤을 때 ‘대응할 준비가 완료된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스스로를 리스크에 계속적으로 노출시켜야 더 큰 리스크를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소리다. 비록 영화 속 이야기지만 시사하는 바가 제법이지 않은가?


기업이 평소에 이렇게 작은 리스크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시나리오 플래닝도 한 가지 방법이 아닌가 싶다. 위기가 닥쳤을 때 ‘준비가 된 상태를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려면 그런 위기를 미리 떠올리고 그에 대한 대비책을 예행연습하듯이 시뮬레이션해보는 것이 웨슬리가 이오케인에 대한 면역을 키운 것과 같지 않은가? 물론 위기가 터졌을 때의 상황이 예상했던 것과 약간은 달라서 미리 세워 두었던 대비책을 바꿔야 하거나 변칙적으로 적용해야 하는 경우도 분명히 발생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상황을 임기응변식으로 대응하는 것보다는 대비책을 미리 마련해 두는 것이 상황 대응의 좋은 기준점이 된다.


‘전략적 면역’을 높이는 방법은 전염병에 걸리기 전에 예방주사를 놓는 것이라는, 아주 당연하지만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철칙이라는 점을 영화 <프린세스 브라이드>의 짧은 대사 속에서 발견한다. '잘 나가는' 평소에 '독'을 조금씩 먹어두는 게 나중에 큰 독을 먹을 때를 대비할 수 있다. 이것이 전략 리스크를 예방하는 유일한 해결책 아니겠는가?


“이 오이 소박이 좀 먹어 봐요.”

식당에서 반찬으로 나온 오이 소박이가 맛있어서 H군에게 접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싫어요. 전 오이를 못 먹어요. 냄새 나서.”

원래 모르던 바는 아니었지만 웨슬리처럼 오이에 대한 면역을 평소에 키워야 하지 않겠냐며 나는 이렇게 덧붙였다.

“앞으로 세상에 먹을 것이 오이 밖에 없다고 생각해 봐요. 그래도 오이를 안 먹을 거에요?”

“당연하죠! 안 먹어요, 절대! 그리고 그런 세상은 절대 오지 않거든요!”

시쳇말로 ‘흥, 칫, 뿡!’의 표정으로 H군은 오이 소박이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오이에 독이 들었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내가 다 먹을 수밖에. 난 오이에 대한 면역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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