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주간 유정식' 70호 경영수필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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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0일 이후 국민의 절반은 자신의 투표권에 효능감을 경험하며 새 정부에 나름의 기대를 하고 있을 것이다. 반면에 나머지 절반은 깊은 실의에 빠져 있으리라. 생각 같아서는 확 이민이라도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을 것이다. 하다못해 훌쩍 해외여행이라도 떠나면 좋겠지만 아직 코로나 시국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터라 그마저도 녹록치 않다. 

일에 집중하다가도 ‘그것’만 떠올리면 한숨이 절로 나오고 잠을 설치기가 일쑤다. 길을 걷다가도 “저 무리의 절반은 나와 생각이 완전히 반대이겠구나.”란 생각에 공포스러웠다고 말하거나, 음식점 옆자리에서 보란 듯이 축하 건배를 나누는 사람들이 보기 싫어서 그곳을 바로 빠져나와야 했다고 고백하는 이들도 있다.

이 글이 나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는 글이라 조심스러운 마음이지만, 그리고 나 또한 그 절반의 일원이라서 반대 의견을 지닌 구독자분들의 오해를 살까 두렵긴 하지만, 일종의 자기치유의 방도랄까? 현재 집단우울증의 증상을 겪는 우리나라 국민의 절반에게 앞으로 5년을 어떻게 견뎌야 하는지를 이 자리를 빌어 이야기해 봐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사실 나라고 해서 방법을 알지 못한다. 오히려 내가 인생의 구루로부터 답을 절실히 구해야 하는 입장이다. 그래서 찾아 봤다. 기억하겠지만, 2016년 말에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던 때에 절반이 넘는 많은 미국인들이 비슷한 경험을 했던 모양이다. 

구글에서 ‘How to survive in trump’란 키워드로 검색을 하면 상당히 많은 글들이 쏟아져 나온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셉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의 글도 있고 여러 정치 블로거들이 분노를 담아 휘갈려 쓴 듯한 글도 있다. 트럼프 정부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심했던지 아마존에 절망하거나 도피하지 말고 맞서 싸우라는 조언을 담은 <트럼프 세상에서 살아남기(Trump Survival Guide)>란 책이 올라와 있을 정도다.

 


나는 요 며칠 동안 그 글들을 꼼꼼히 읽으며 우리 상황에 맞는 ‘내가 뽑지 않은 대통령의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을 머리 속으로 정리했다. 어떤 조언은 지나치게 정치적이라 의미가 적었고, 또 어떤 조언은 가열찬 반격을 주장하는 것이라서 몸을 추스를 힘도 없는 지금의 상태에선 무리가 있었다. “이민이나 가버려야겠다.”라든지 “시골에 내려가 농사나 져야겠다.”라는 생각도 나름의 방책이겠지만, 5년은 긴 시간이다. 좌절하거나 도피하기엔 아까운 시간이고, 그런다고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절망 혹은 분노의 에너지를 ‘우리 개인의 생산적 에너지’로 바꾸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이 질문에 집중하기로 했고, 여기에 나만의 생각을 몇 가지 끄적거려 본다.

축적의 로드맵을 그려라
5년 후가 되면 자신에게 ‘작품’ 하나가 남을 수 있는 시간으로 사용할 것을 제일 먼저 조언한다. 밖으로 향한 시선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5년의 시간을 축적에 매진할 절호의 기회로 설정하면 어떨까? 그게 자기 인생 최초의 책이 됐든 아니면 기술이나 자격증이 됐든, 지금까지 막연히 생각만 했거나 기대를 했던 것을 성취해 낼 시간으로 사용하기에 5년은 아주 넉넉하다. 내가 ‘축적’이라는 말을 쓴 이유는 한번에 큰 걸음을 내딛으려 하기보다는 조금씩 해나가야 의지력을 유지하기에 좋기 때문이다. 2022년부터 2026년 말까지의 달력을 쭉 펼쳐 놓고 본인이 축적해 내고자 하는 것을 어떤 단계로 성취해 갈 것인지 ‘큰 그림’을 그려보라.

예를 들어 책을 쓰고 싶다면 이렇게 로드맵을 정하면 어떨까? 5년 중 2년은 해당 주제에 대한 공부와 자료 찾기에 매진하고, 3년차엔 책 전체의 구성에 집중하며, 나머지 2년은 본격적으로 책을 쓰고 완성하는 시간으로 사용하면 좋을 것이다. 며칠 밤을 새워 일필휘지로 쓰기보다는 일주일 중에 특정 시간대를 정해서 “이 시간은 온전히 책을 쓰는 데 사용한다”고 다짐하기 바란다. 한번에 2~3페이지만 쓰기로 한다면 2년 후에는 웬만한 책 한 권 분량의 글을 축적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오프라인의 시간을 늘려라
개인적으로 요 며칠 유튜브를 절독하고 뉴스를 끊었다. SNS에 글을 올리긴 하지만 뉴스피드를 보지 않고 내 ‘담벼락’만 본다. 그랬더니 일에 대한 집중력이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을 여유시간이 많이 늘어났다. 매일 1시간씩 음악을 집중해서 듣기 시작했고 그간 지지리도 읽히지 않았던 종이책의 글밥도 눈에 들어온다. 글 한 편을 한두 시간만에 뚝딱 써내는 기적같은 생산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동안 얼마나 온라인에 푹 빠져 살았는지, 그 시간이 얼마나 소모적이었고 비생산적이었는지 새삼 느끼는 중이다. 지금의 이 상황이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 말 다했다 싶다.

지금은 온라인의 즉시적이고 단편적이며 심도 낮은 정보를 멀리하고 누군가가 오랜 시간을 축적해 낸 깊이 있는 지혜에 탐닉할 절호의 기회다. 예전에는 불가촉천만처럼 취급했던 진지하고 두꺼운 고전을 사서 읽어라. 어려울수록 좋다. 언제 어려운 글을 읽을 기회가 있겠는가? 수행하듯 읽고 또 읽어라.

책읽기가 버겁다면 오프라인으로 할 수 있는 새로운 취미를 가져보는 것도 좋으리라. 남는 시간에 술이나 마시고 잠이나 자는, ‘무취미’의 삶은 옆에서 보기에 안쓰럽기 그지없다. 건강을 해치지 않는 취미여야 하고 행복감을 고양하는 취미여야 한다. 자기 성장에 도움이 되는 취미면 더할나위없이 좋을 것이다. 나는 5년 동안 목공을 취미로 해 볼 생각이다. 아직 실행에 옮기지 않았지만, 마음을 추스리고 나면 시작해 보려 한다. 5년 후에 작은 스툴이나 테이블 하나 정도는 뚝딱 만들 수 있는 능력치에 도달하면 좋겠다 싶다. 

 


지지하는 단체를 후원하라
정치적 무관심의 기류를 사회 전체적으로 조성한다는 것, 이게 바로 절망과 체념이 무서운 까닭이다. 염증의 대상은 정치가들이지 정치 그 자체가 아니다. 또한 선거가 정치의 전부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헌신하는 단체나 정당을 지지하고 후원하는 일이 진정한 의미의 정치 참여다. 긍정적인 의미로 정부의 질주에 브레이크를 걸며 저항하는 일이다. 밖에서 욕만 하지 않고 지지하는 정당의 당원이 되어 실질적 압력을 가하는 것 역시 우리에게 주어진 권리다.

꼭 그런 단체에 직접 참여해 활동하라는 소리는 아니다. 동물권에 관심이 많으면 동물보호단체에, 경제민주화를 신념으로 삼는다면 그에 대한 실질적 대안을 제시하는 시민단체에 자신이 최선을 다해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 된다. 그게 ‘소리없는 기부’일 수도 있고, 찬성 의사를 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좀더 적극적이라면 평화적인 ‘온/오프라인’ 시위에 가담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고독해지는 법을 배워라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외롭게 지내라는 소리는 아니니까. 어른이 됐다는 것은 스스로 경제적,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고독을 즐길 줄 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보통 사춘기를 지나며 부모와의 분리 불안을 더 이상 느끼지 않게 되지만, 나이를 충분히 먹고서도 주변인들과의 정신적 분리에는 익숙하지 못한 이들이 생각 외로 많다. 늘 누군가를 만나지 않으면 안 되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면 안 되며,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도 누군가의 도움을 갈망하고, 스스로 결정하기보다 타인의 결정에 삶을 맡기는 이들. 고독할 줄 모르는 삶은 불행하다. 

고독이란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뜻이다. 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간에 잠시멈춤을 누르고 무엇을 위해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자신의 삶을 ‘철학하며’ 5년을 보내자. 정치공학적인 난삽한 가십과 덜떨어진 유사 담론에 취하지 말고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온전히 자신을 사색하자. 사색(思索)은 ‘깊이 생각하며 무언가를 찾는다’는 뜻이다. 고독해야 사색할 수 있다. 나는 매주 토요일 오전을 이렇게 ‘멍 때리며’ 사색하는 시간으로 보내려 한다. 5년이니까 앞으로 500시간 가량을 사색하는 데 쓸 수 있겠다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큰 위안이 된다.

5년 후면 나는 50대 후반이 된다. 치열하게 인내하며 살련다. 이 아까운 시간을 절망하는 데, 그들 욕하는 데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쓴 글이니, 나와 반대를 찍으신 분들은 노여워하지 않기를 바란다. 자조(自助)의 몸부림이라고 여기는 아량을 베풀어주기 바란다.  (끝)

 

* 이 글은 '주간 유정식' 70호 경영수필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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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이 온라인 교육사업에 뛰어 들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그저께 페이스북은 '런 위드 페이스북(Learn with Facebook)'이란 사이트를 오픈하며 2020년까지 미국 내에서 100만 명의 사업주들을 교육사업의 고객으로 끌어들이겠다는 목표를 발표했습니다. 사이트 주소는 https://learn.fb.com 입니다.


접속하면 아직까지 많은 교육 프로그램이 업로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디지털 마케팅을 어떻게 시작하고 심화해 가는지, 경력을 어떻게 관리해 나가야 하는지에 관한 내용으로 모두 13개의 과목이 올라가 있죠. 한 과목은 4분에서 11분 정도 밖에 되지 않으니, 마음만 먹으면 1~2시간 만에 모든 과목을 수강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 'Learn with Facebook의 첫화면. http://learn.fb.com 에서 캡쳐)



처음에는 미미하지만 SNS의 거대기업인 페이스북이 추진하는 야심찬 프로젝트라서 프로그램의 양과 질은 점차 강화되리라 보여집니다. 페이스북의 정책 마케팅 책임자인 파티마 살리우(Fatima Saliu)는 '런 위드 페이스북' 사이트의 목표고객은 경력 단절 이후에 재취업을 원하는 사람들, 디지털 경제 부문에서 입문 수준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스킬을 습득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런 위드 페이스북이 '경력 개발의 포털'이 되겠다는 것이죠.


런 위드 페이스북의 론칭은 링크드인이 자리잡고 있는 영역으로 페이스북이 깊숙이 진입한다는 강력한 도전장이기도 합니다. 링크드인도 2015년부터 '링크드인 러닝(LinkedIn Learning)'을 운영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페이스북은 지난 해부터 기업들이 페이스북을 통해 취업 정보를 포스팅하는 서비스를 강화하고 있는데, 1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페이스북을 통해 취업에 성공했다고 밝힙니다. 또한 페이스북은 멘토십(Mentorship) 도구를 개선하여 사용자들이 타 그룹 멤버들의 특정 경력과 전문영역을 검색할 수 있도록 만들 예정입니다. 전문가 서칭을 보다 쉽고 빠르게 하도록 해주겠다는 의도입니다. 이런 사업들 모두 링크드인과 상당히 중복되는지라 두 거대 SNS 공룡기업 사이에 벌어질 앞으로의 싸움이 흥미진진하리라 예상되네요.


많은 사람들의 페이스북의 해가 저물어 간다고 이야기합니다. 때가 되면 다른 SNS가 페이스북을 대체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페이스북은 2018년 9월 기준으로 월간 이용자수가 22억 7,100만 명에 이르는, 거대한 사용자 베이스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죠. 거대한 사용자 베이스를 기반으로 온라인 교육 사업까지 뛰어드 페이스북이 과연 '경력 개발 영역'의 강자가 될 수 있을까요? 확실히 성공할 수 있다는 예측은 할 수 없지만, 저는 페이스북에게 승산이 충분하다고 봅니다(적어도 북미 시장에서는). 플랫폼 규모 그 자체가 페이스북의 강한 경쟁력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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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이나 지방 행정가들은 크고 작은 국제 스포츠 행사를 유치하는 일을 좋아한다. 임기 중에 국제 행사를 유치하면 자신의 업적을 홍보하기에 좋고 그 덕에 유권자로부터 표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듯하다. 그들은 국제 스포츠 행사가 가져올 경제적, 사회적 효과를 구체적인 수치로 제시하면서 유권자들의 동의와 성원을 기대한다.


정치인들이 내세우는 경제적 효과 중에서 항상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것이 바로 고용 효과이다. 경기장을 건설할 때는 물론이고 이벤트가 끝나고 경기장을 운영하려면 사람들을 고용해야 한다고 말이다. 언뜻 보면 맞는 말인 듯 하지만, 여러 경제학자들이 지적한 바에 따르면 이 말은 거짓이다. 범위를 좁혀서 보면 스포츠 행사 관련된 일자리는 늘어나긴 한다. 하지만 범위를 넓혀서 보면 그렇지 않다. 경기장을 짓고 운영하기 위해 소요되는 비용은 다른 곳에 쓰인다면 고용을 더 늘릴 수도 있는 돈이기 때문이다. 즉, 스포츠 행사를 치르기 위한 비용 조달로 인해 다른 곳의 일자리가 줄어드는 역효과가 발생한다. 장기적으로 탄탄한 일자리 창출을 위한 기반이 약해져서 오히려 실업을 촉진시킬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또한 스포츠 행사로 발생하는 일자리의 질도 그리 좋지 못하다. 경기장 건설 인력은 건설 기간이 끝나면 일자리를 보장 받기 어려울뿐더러 이벤트 이후의 경기장 운영 인력은 저임금의 비정규직과 시간제 근로자들로 채워질 가능성이 크다. 크롬튼(Crompton), 바데(Baade), 홀(Hall)을 위시한 여러 경제학자들이 이같은 불편한 진실을 이미 여러 논문을 통해 지적한 바 있다. 국제 스포츠 행사가 일자리를 늘린다는 정치인들의 수사를 글자 그대로 믿지 말아야 하는 대목이다.




국제 스포츠 행사 유치를 추진하는 사람들은 경제적 효과를 산정할 때 이벤트가 끝나고 남는 시설들의 유지비용은 고려하지 않는다. 멋있게 건설한 경기장들은 적절한 활용 방법이 없으면 어느새 돈 먹는 하마가 되고 만다. 텔로글로우(Telloglou)에 따르면, 시드니에 지어진 슈퍼돔의 1년 운영비용을 감당하려면 1주일에 한번씩 거대 행사를 유치해야 한다고 한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의 메인 스타디움으로 쓰였던 잠실 주경기장 부근을 지날 때마다 1년에 며칠이나 사용한다고 저 큰 경기장 유지에 돈을 쏟아 부을까, 란 생각이 든다. 우리에게는 뜨끔한 말이지만, 2002년 월드컵에 관해 연구한 만젠라이터(Manzenreiter)와 호르네(Horne)는 거대한 스포츠 행사를 치르려고 지은 경기장들이 경제를 활성화시킬 거라는 약속은 지키지 못할 약속이었다고 결론 내린다. 그들이 연구 대상으로 삼은 곳은 일본의 경기장들이었지만,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관광객이 늘어난다는 말도 실은 거짓이다. 물론 스포츠 행사가 치러질 때와 치러지는 장소에 사람들이 몰려 들기는 한다. 하지만 이는 착시에 불과하다. 이벤트를 치르는 도시 이외의 지역을 방문할 수도 있는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때문에 국가 전체적으로 보면 관광객의 순증가 효과는 미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어차피 방문할 관광객들이 이벤트를 치르는 기간을 택해서 왔다가 갈 가능성도 크다. 반대로, 이벤트 때문에 혼잡스러워질 것을 우려하여 다른  국가나 다른 지역을 여행하는 자들도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국제 스포츠 행사의 관광객 증가효과는 신뢰할 만하지 않다.


국제 스포츠 행사의 경기부양 효과도 의심의 대상이다. 행사에 소요되는 비용을 조달하기 위한 증세 조치는 가계 소비를 위축시켜 경기에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또한 국가와 지역의 성장동력 창출에 기본인 교육, 의료, 복지 등에 투자돼야 할 공적자금이 길어봤자 한 달 정도인 스포츠 행사에 몰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국제 스포츠 행사의 경제적 효과가 크다는 말은 틀렸다. 




그래도 거대 행사를 유치하면 국민들의 행복이 증진되지 않겠느냐며 이에 반론을 제기할지 모르겠다. 우리나라(혹은 우리 도시)가 국제 스포츠 행사를 주관하게 됐다는 자부심이 클 테니 말이다. 그러나 조르지오스 카벳소스(Georgios Kavetsos)와 스테판 스지만스키(Stefan Szymanski)는 이와 같은 생각도 착각이라고 단언한다. 그들은 1976년부터 2000년까지 올림픽, 월드컵 축구, 유로컵 축구 경기를 치른 국가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그 국민들의 행복도가 특별히 높지 않다는 점을 밝혔다. 물론 행사를 치르는 해의 행복도는 높았지만, 그 효과는 급격히 사라졌다. 스포츠 행사를 치른다는 자부심과 행복감은 결혼에 비견할 만큼 크지만 그 효과는 금세 꺼지고 만다는 것이다.


정치인들이나 지방 행정가들이 국제 행사 유치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항상 제시하는 경제적 효과와 '행복 증진 효과'는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오히려 거대 행사를 치르는 바람에 경제가 나빠진다는 사실을 많은 연구들이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국제 스포츠 행사 유치가 거시적 경제 효과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유권자의 표를 얻기 위한 도구라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요즘 평창 동계 올림픽 개최일이 몇 주 앞으로 다가오는 가운데 북한과의 단일팀 구성 및 동시 입장으로 연일 뉴스의 톱을 장식하고 있다. 이런 축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지만 혹여 올림픽 개최를 통해 경제적 효과를 잔뜩 기대한다면 이는 허황된 기대라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올림픽 개최로 64조 9천억원(약 65조원)의 경제적 효과가 예상된다고 하는데, 이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참고논문)

Georgios Kavetsos, Stefan Szymanski(2010), National well-being and international sports events, Journal of Economic Psychology, Vol.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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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제가 월간 샘터 2017년 5월호의 <과학에게 묻다>라는 칼럼에 소개한 글입니다.



2017년도 4개월이 흘렀다. 3분의 1이 지난 시점에서 올해 세웠던 계획을 다시 점검해야 할 시기다. 많은 이들이 여러 목표 중 하나로 살빼기를 설정했을 터인데 과연 그 목표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을까? 아직 8개월이나 남았으니 ‘다이어트는 내일부터’라는 말을 반복하며 여전히 치맥을 즐기고 있지 않을까?.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내가 바로 허풍 떨듯 ‘기필코 다이어트!’를 밤마다 외치는 사람이니 말이다.


살이 찌지 않으면서도 맛있는 음식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런 말을 하면 운동을 권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운동은 오히려 입맛을 좋게 하여 뱃구레를 늘려 버린다. 그래서 운동을 중단하면 고스란히 살로 축적되어 다이어트고 뭐고 포기하기 십상이다. 게다가 섭취한 칼로리보다 운동으로 더 많은 칼로리를 태워야 살이 빠지기 때문에 운동은 습관이 들기 전까지 괴로움 그 자체다. 조각 케이크 하나에 해당되는 칼로리(500Kcal)를 모두 연소시키려면 10Km 정도 뛰어야 한다.




분자생물학적으로 살찌지 않으면서 미식을 즐기는 방법은 한번에 먹을 양을 조금씩 나누어 자주 먹는 것이다. 질량보존의 법칙을 떠올려 보면 이 방법은 이치에 맞지 않는 듯 보인다. 한번에 먹든 몇 번에 나눠 먹든 몸 안으로 들어가는 음식양은 똑같으니까 축적되는 체지방도 같지 않을까? 1000Kcal를 섭취할 경우 100그램의 체지방이 쌓인다면, 100Kcal를 섭취할 때는 10그램의 체지방이 생기지 않을까? 그러니 1000Kcal를 10번에 나눠 먹어도 체지방이 모두 100그램 쌓일 것만 같다.


하지만 우리의 몸은 그렇게 비례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들어간 양이 많아진다고 그에 따라 아웃풋이 ‘선형적’으로 늘어나지 않는다. 오디오의 볼륨 조절 다이얼을 돌려본 사람이라면 처음에는 소리가 조금씩 커지다가 나중에는 약간만 돌려도 볼륨이 갑자기 커지는 현상을 경험했을 것이다. 인간의 몸도 그렇게 ‘비선형’적이다. 1000Kcal을 한꺼번에 먹으면 100그램의 체지방이 생기더라도 100Kcal씩 나눠서 먹으면 10그램보다 훨씬 적은 체지방이 쌓인다. 




왜 그럴까? 섭취한 영양소는 몸 속으로 들어와 최종적으로 포도당으로 변하고 혈액에 스며들어서 모세혈관을 통해 각 세포에 공급된다. 그리고 지방세포는 포도당 수용체를 세포막에 배치시켜 혈액 속의 포도당을 안으로 흡수하고 지방의 형태로 저장한다. 이를 관장하는 기관이 바로 췌장이다. 췌장은 인슐린이란 물질을 통해 지방세포로 하여금 포도당 수용체를 세포막에 배치하도록 한다. 혈중 포도당이 갑자기 증가할 경우 췌장은 다량의 인슐린을 각 세포에 뿌려대는데, 이런 신호를 받은 세포는 인슐린의 양만큼 포도당 수용체를 만들어내어 다량의 포도당을 지방으로 쌓아둔다. 포도당이 지방으로 축적되는 걸 최소화하려면 인슐인의 대량 방출을 막아야 하고, 그럴려면 조금씩 적게 먹음으로써 췌장에게 ‘나 많이 먹지 않았어’라고 속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일하거나 공부할 때 먹을 것을 옆에 두고 오며가며 조금씩 먹는 것이 고통을 동반하지 않으면서도 살을 빼는 방법이다. 치즈 케이크라도 앉은 자리에서 한번에 먹지 않으면 다이어트 걱정은 덜해도 괜찮다. 하지만 사무실이나 학교에서 항상 음식을 꺼내 놓으며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된장찌개 백반을 옆에 두고 30분마다 두 세 숟갈씩 퍼먹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다이어트의 관건은 섭취하는 칼로리의 총량이 아니라 칼로리의 흡수속도라는 점을 떠올리면 해결책이 생긴다. 음식을 한번에 먹되 가능한 한 칼로리의 흡수속도가 느린 음식을 먹음으로써 혈당의 갑작스런 증가, 인슐린의 과다 분비, 포도당 수용체의 과다 활성화를 막는 것이다. 흰 쌀밥의 흡수속도가 85인 반면 현미는 50이니 똑같은 양을 먹더라도 현미로 식단을 바꾸면 적어도 살이 찌는 것은 막을 수 있다. 


2017년이 7개월 정도 남았다. 나눠서 자주 먹고 칼로리 흡수속도를 조절한다면 한달에 1Kg씩 감량하여 연말이 되면 7~8kg을 뺄 수 있지 않을까? 맛있는 음식을 양껏 먹으면서 말이다.



* 이 글은 월간 샘터 2017년 5월호의 <과학에게 묻다>라는 칼럼에 소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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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26일(화) 유정식의 경영일기


“이런 교육 요청이 들어왔는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올 초에 모 기업으로부터 어떤 교육을 의뢰 받은 후에 나는 H군에게 의견을 물었다.

“재미있는 주제인 거 같은데요?”

“그렇긴 한데 이쪽 분야에 대해서 그리 많은 관심을 두지 않았거든요. 제가 강의하는 게 맞나 싶기도 하고.”

“그래도 그 회사에서 적합하다고 생각하니까 대표님에게 강의를 의뢰한 것 아니겠어요? 어렵겠지만 시도해 보세요.”


정말이지 내키지 않아서 할까 말까 무지하게 고민했던 강의 주제는 바로 ‘밀레니얼 세대 직원들의 몰입’이었다. 금년은 뭐든 시도해 보는 게 좋다며 싫어도 수락해야 한다는 H군의 반강제적(?) 조언에 따라 강의를 진행하기로 했지만, 어떻게 말을 풀어가야 할지 몰라서 초반엔 엄청 애를 먹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관련자료를 얻기가 쉽지 않았기에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나 아마존을 뒤질 수밖에 없었다. 


놀라운 것은 미국에서는 밀레니얼 세대에 대한 연구 조사 자료가 매우 많다는 사실이었다. 어떤 연구자가 밀레니얼 세대의 특징은 이렇다라고 말하면 다른 연구자가 근거를 들어 논박할 정도로 논의가 활발한 영역이라는 점을 새삼 알게 되었다. 갑론을박 논쟁이 벌어지는 분야라 어떤 주장이 옳은지 판단하기가 어려워서 여러 연구자들이 밀레니얼 세대에 공통적으로 내놓는 의견을 바탕으로 내 경험을 섞어서 강의 내용의 얼개를 잡아나갈 수밖에 없었다. 돌이켜 보니 한달 내내 자료 수집하고 강의자료 만들고 대략의 강의 대본을 만들던 올해는 시작부터 ‘이걸 해? 말아?’라는 번민의 시간이었다. 





어찌어찌하여 4시간 분량의 강의 내용을 완성하여 고객사 앞에서 시험 강의를 한 다음 수정을 거쳤고, 3월에 ‘밀레니얼 세대의 이해와 조직몰입’이란 타이틀로 강의를 진행했다. 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나 또한 그 강의에 몰입했고, 강의를 끝내고 나오면서 느꼈던 해방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강의 평가가 어떻게 나오든 일단 끝냈다는 것에 만족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런 주제로 어떤 기업이 또 강의를 의뢰하겠나 싶은 생각도 들어서 그동안의 시간 투자가 과연 의미가 있을까란 의심이 마음 한켠에 남아서 허탈함 또한 컸던 것으로 기억된다.


헌데 어떻게 알아냈는지 모르지만 몇몇 기업에서 내가 밀레니얼 세대의 이해를 강의했다는 소식을 듣고 연락을 해왔다. 조찬 강의를 해달라는 곳도 있었고 그때의 평이 좋아서 리더들의 집합교육 때 심화 교육을 진행해 달라는 곳도 있었다. 내가 운영하는 ‘중요한학교’에서 공개강의를 열기도 했다. 몇 번 강의를 수행하니 밀레니얼 세대에 대한 전문가로 나를 칭하는 분들도 있는데, 서두에 언급했듯이 이 쪽의 전문가라고 호칭되기에는 너무나 부끄럽다. 그저 난 여러 연구자들의 연구 결과를 정리하여 전달한 사람에 지나지 않으니 말이다. 전문가라는 호칭은 붙이지 말아 주시길 부탁 드린다. 


어쨌든, 강의를 의뢰할 기업들이 많지 않을 거란 예상이 틀렸다고 생각 들 정도로 제법 의뢰가 들어오는 걸 보고 많은 조직들이, 흔히 말하길, ‘요즘 젊은 직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고민이 크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1980년부터 2000년 사이에 태어난(현재 17~37세) 밀레니얼 세대가 예의가 없고, 힘든 일을 싫어하고, 자기 주장이 강하고, 충성심이 낮고, 보상에 관심이 많고, 의존적이라는 생각이 수강생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특히 ‘힘든 일을 싫어한다’는 것에는 베이비 붐 세대와 X세대에 해당되는 수강생들이 거의 만장일치로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이 흥미롭다. 자신들이 초년병일 때는 윗사람이 시키면 아무런 불평없이 수행했는데, 요즘 젊은 직원들은 ‘그걸 왜 해야 하는데요?’라며 반발을 한다는 것이 그들 주장의 맥락이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웠던 자신들에게는 이의를 제기하는 밀레니얼 세대가 속된 말로 ‘싸가지 없다’고 느껴지는 모양이다. 


하지만 솔직해지자. 예전에 상사의 지시에 무조건 순응했다는 건 진짜 사실일까? 본인만 그렇게 생각했을 뿐 하기 싫어서 이런저런 표정을 드러내거나 동료에게 상사 욕을 쏟아내진 않았을까? 어떤 세대이든 누구나 힘든 일은 싫어한다. 밀레니얼 세대라고 해서 힘든 일을 언제나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의미없는 일을 왜 해야 하는지 알고 싶을 뿐이다. 밀레니얼 세대 직원들에게 반복적으로 관행적인 일을 시키면서 그냥 예전부터 해왔으니까 ‘너도 해야 한다’는 식으로 소통하지 않았는지 반성할 일이다. 그들에겐 ‘의미’에 관한 설명이 필요하다. 학교 다닐 때부터 엄청난 경쟁을 몸으로 경험했고 어렵게 입사한 직원들이다. 경쟁을 해야 하는 이유가 다른 어떤 세대보다 뚜렷하게 각인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떠안은 업무의 이유가 명확치 않으면 일할 동기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출처: https://2020workforce.com/tag/millennials/



물론 보상에 민감해서 더 많은 보상을 약속하는 조직으로 언제든 옮기고 싶어한다는, 밀레니얼 세대에 대한 평가는 틀리지 않다. 하지만 그게 밀레니얼 세대만 그런가? 누구나 그렇다. 더 나은 기회가 손짓을 하는데 그에 응하고 싶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런데 왜 밀레니얼 세대만 억울하게 그런 평을 받는 걸까? 몰입에도 여러 대상이 있는데, 크게 ‘조직몰입’과 ‘경력몰입’으로 나뉜다. 기성세대들은 조직과 자신 사이에 일체감을 느끼는 ‘조직몰입’이 출세 혹은 성공 방정식의 중요 변수라고 느끼지만(물론 요즘은 많이 옅어졌지만), 밀레니얼 세대는 자신의 경력에 훨씬 무게중심을 둔다. 경력개발 관점에서 조직을 바라보지, 조직 관점으로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다. 좋은 상사를 둔 직원이라 해도 한 조직에 ‘충성’하며 오래 다니겠다는 생각보다는 더 넓은 세상에서 더 고차원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 의지가 커진다. 그 좋은 상사가 그런 기회를 감지하도록 이끌어줬기 때문이다. 


조직몰입보다는 경력몰입을 우선하기에 밀레니얼 세대 직원들의 조직충성도가 낮다는 평을 받지만, 이제 조직충성도라는 말의 정의를 바꿀 필요가 있다. 상사와 경영자가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지시를 내리더라도 묵묵히 따르는 게 조직충성이라고 생각하는 건 시대에 뒤떨어진 군대식 사고방식이다. 밀레니얼 세대가 자신의 경력에 몰입하는 건 뒤바꿔 놓기 불가능한 거대한 방향이니, 그 경력몰입의 흐름을 조직에서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쪽으로 유도하는 것이 보다 현명할 것이다. 경력몰입의 장을 조직이 열어주고 그 성과를 같이 공유함으로써 조직과 개인이 동반성장하는 방향으로 생각을 전환하는 것이다. 그들이 조직을 떠난다면 더 넓은 세상에서 능력을 발휘하도록 ‘우리가 키워냈다’는 자부심을 오히려 느끼는 ‘쿨함’이 필요하다.


강의를 진행하면 ‘밀레니얼 세대의 특징을 보니까 우리랑 별반 다를 게 없는 것 같은데요.’라는 말이 꼭 나오곤 한다. 맞다. 그들은 그리 다르지 않다. 같은 인간이니 욕망이 다르겠는가? 밀레니얼 세대는 자기주장이 강하고 IT에 친숙하다는, 그 몇 가지 다른 점 때문에 우리가 그들이 특성이 확연히 다르고 ‘다루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을 더욱 증폭시키는 건 아닐까? 이것이 내 강의의 가장 키포인트이다. 다른 측면을 바라보기 전에 동일하고 비슷한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직장 내 세대간 갈등의 해결 포인트일 것이다.


“내가 연변 아줌마 때문에 상처 받은 적이 있어요.”

H군은 모 기업에 밀레니얼 세대의 이해를 주제로 강의를 하러 가는 나에게 뜬금없이 이렇게 말했다. 

“어떤 일이 있었는데요?”

“아줌마가 힘들게 일하시길래 내가 이것 좀 드셔보세요, 라고 친절하게 말했는데 단칼에 ’일 없어요’라고 하더군요.”

“그 말은 ‘괜찮아요’란 뜻 아닌가요?”

“그렇지만 처음에 그 말을 들을 때 내 배려가 무시 당하는 것 같아서 진짜 상처 받았거든요.”


밀레니얼 세대들도 이와 같다. 그들의 어법와 사고 스타일, 취향이 조금 다른 것을 보고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여기고 어쩔 때는 '상처까지 받는 것'은 아닐까?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하는, 아주 간단하지만 동시에 아주 어려운 ‘입장 바꿔 생각하기’가 해법이다.

“어, 이 사례를 강의 때 인용하려고 하죠?” 

H군이 사무실을 떠나는 나에게 묻는다.

나는 단박에 대답했다.

“일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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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4일(월) 유정식의 경영일기


최근에 나는 차를 바꿨다. 장기렌트 방식으로 자동차를 빌려 타고 있었는데, 연희동으로 이사를 오고 나니 그 차가 골목이 많은 동네 특성상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비록 크기는 준중형 자동차(아반테 정도) 정도였지만, 코너를 돌거나 요철 많은 골목길을 갈 때 적잖이 조심스러웠다. 다음에 차를 바꾸게 되면 필히 작은 차로 하겠다는 마음이 절실할 정도였으니까. 다행히 장기렌트카 반납 시점이 도래했고 때마침 모 자동차 동호회에서 괜찮아 보이는 중고차 매물이 나왔기에 곧바로 거래를 했다. 돌이켜보니 대학교 다닐 때 ‘프라이드’를 첫차로 구매한 이래로 첫 번째 중고차다.


나온 지 7년된 중고차(수입차이지만 연식이 오래돼 국산 소형차 가격보다 싸다)이고 크기도 내가 딱 원하던, 전장 4미터 미만의 작은 차다. 골목 모퉁이에서 속도를 많이 줄이지 않아도 스티어링 휠을 돌리기만 하면 쏙쏙 빠져나가고, 양쪽에 불법주차를 해 놓아서 좁아진 길도 여유있게 지나갈 만큼 작은 차다. 일렬주차를 해도 앞뒤가 넉넉하게 남아 그다지 애쓰지 않고 바로 주차를 할 수 있다. 그 동안 주차해 놓으면 전봇대 위에 앉은 새들의 ‘똥 세례’를 많이 받아서 새똥 닦아내느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이 차는 앞뒤가 짧은 덕에 새똥을 받아내는(?) 면적이 작아서 그런지 새똥이 피해가는 느낌이다(물론 몇번 맞기는 했다). 그러니 이 차야말로 연희동 환경에 딱 맞는 ‘좋은 차’가 아닌가? 




하지만 이 차는 누군가에겐 ‘안 좋은 차’이기도 하다. 동호회를 통해 차를 구매하기 전에 매물을 알아보러 중고차 전문 매장을 둘러보기도 했는데, 이 차와 같은 차종을 발견하고 딜러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던 중이었다. 나이가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부부가 곁으로 오더니 자기들끼리 그 차에 대해 평을 주고 받기 시작했다. 부인이 그 차의 깜찍하고 귀여운 모습을 마음에 들어하자 남편이 가볍게 핀잔을 주었다. “당신이 차를 몰라서 그래. 승차감이 정말 나쁜 차야. 예쁜 것만 보고 샀다가 실망하지. ‘객관적’으로 정말 꽝이야.” 그는 차를 향해 손가락으로 X자를 그려가며 싫은 표정을 지엇다. 부인에 비해 차를 잘 안다는, 약간의 거만함이 섞인 얼굴이었다. 이 차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바로 나)이 옆에서 딜러와 이야기를 하고 있든 말든 상관없는 건가?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았다. ‘이보게, 친구. 자네가 차를 몰라서 그런 모양인데, 이 차 샀다가 후회할 거야.’라고 말이다. 나는 머쓱해지려다가 살짝 기분이 상했다.


궁동산에서 내려다 본 연희동



그 아저씨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다. 예전부터 그 차의 ‘악명 높은’ 승차감은 실제의 오너들로부터 들어왔기 때문이다. 서스펜션이 아주 ‘딱딱해서’ 길바닥의 크고 작은 요철에도 통통 튀고 휠베이스(축거, 앞뒤 바퀴 사이의 거리)와 윤거(좌우 바퀴 사이의 거리)가 짧은 탓에 바닥에서 오는 충격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차를 인수하고 며칠 타고 다녀보니 ‘엉덩이로 길바닥을 스캔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대번에 알게 됐다. 게다가 서스펜션이 딱딱해서 타이어가 노면을 ‘타는’ 경우도 많다. 약간 굴곡이 있는 도로면을 지날 때 약간씩 차가 휘청거리는 느낌이 있고 어떨 때는 ‘토크 스티어(핸들이 약간 돌아가는 현상)’도 발생하기도 한다. 이 차의 동호회 회원들은 뭐라 말할지 모르지만(그것마저 이 차의 매력이라고 할 것 같다) 아저씨의 말처럼 승차감이 꽝인 차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아저씨의 악평에 할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승차감 저하는 차 자체의 특성도 한몫 하지만 우리나라 도로가 정말로 형편없다는 게 더 큰 이유이니까 말이다. 운전을 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듯이 깨끗한 노면을 만나기가 드물다. 보수한 흔적(소위 ‘땜빵’)이 없는 구간이 없을 정도다. 특히 비가 많이 오고 나면 아스팔트가 떨어져 나가 길이 패이기도 해서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 골목길은 상황이 더 심각하다. 평탄 작업을 제대로 하지 않았는지 육안으로 봐도 ‘주름진’ 길도 있고, 조각보처럼 ‘땜빵’이 더 많은 곳도 있다. 이런 길을 가야 하니 승차감이 좋을 리가 있나? 


외국 이야기를 해서 좀 미안하지만, 매끈하게 깔린 독일과 일본의 도로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간선도로뿐만 아니라 이면도로, 골목길도 철저하다 싶을 정도로 ‘땜빵’ 하나 없이 깔려 있는 도로는 엉덩이에 별로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다. 아우토반에서 속도 무제한으로 달릴 수 있는 이유는 노면이 그만큼 매끄럽기 때문이다. 짐작컨대 도로 포장이 우수한 독일과 일본에서는 이 차(내가 소유한 차)가 승차감이 나쁜 차로 그렇게 지탄을 받을 만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 토목기술이 세계적이라고 자화자찬하던데, 길 하나 매끈하게 깔지 못하는 ‘기본기 부족’에도 왜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이런 도로 환경 때문에 국산차의 서스펜션은 상대적으로 물렁물렁할 수밖에 없고 그런 쿠션감을 ‘승차감 좋다’라고 느끼는 소비자들이 많다. 번외로 말하는 건데, 승차감은 상당히 광범위한 뜻을 담고 있는 말이라서 차가 푹신푹신하다, 서스펜션이 부드럽다 등으로만 정의 내릴 수 없다.


아우토반.



서론이 좀 길었는데 내가 하려는 말은 이렇다. 우리는 무언가를 평가할 때 그것을 둘러싼 환경에 따라 평가가 크게 달라지는 오류에 빠진다. 그것 자체를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말은 하지만, 환경이 그것에 미치는 영향을 간과한다. 똑같은 차가 어느 환경에 있는가에 따라 ‘좋은 차’가 되고 ‘안 좋은 차’가 되듯이 말이다. 차 자체의 특성은 변함이 없지만 우리나라 여느 도로처럼 울퉁불퉁한 도로를 달리면 ‘안 좋은 차’로, 쭉쭉 뻗은 아우토반을 달릴 수 있는 이와 골목길 운전과 주차 편의성을 우선으로 여기는 이에게는 ‘좋은 차’로 뇌리에 박히는 것이다. 각자가 어느 환경과 어느 조건 하에 있는가에 따라 평가는 이처럼 극과 극으로 갈리기 때문에 ‘내 평가는 객관적이야’라고 장담하는 태도는 때로는 위험한 판단으로 이어질 수 있다.


사람을 평가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가 어떤 일을 맡고 있는지, 그를 둘러싼 상사와 동료들은 어떤 능력을 지녔는지, 예산은 얼마나 주어지는지, 제품이나 서비스의 품질은 어떤지 등 수많은 환경 요소가 한 사람에 대한 평가에 영향을 미친다. 그를 다른 곳에 데려다 놓으면 ‘일 잘하는 직원’이 될 수도 있지만 ‘일 못하는 직원’으로 낙인을 찍을 수 있다. 바로 그런 평가를 내리는 상사와 동료들 자체가 그 직원을 둘러싼 ‘환경’의 일부라는 걸, 자신들이 그 직원의 ‘일 못함’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치는 요인일지도 모른다는 걸 인식하지 못한 채 말이다. 


무언가에 대한 평가는 반드시 그것을 둘러싼 환경 조건에 영향을 받는다. 어찌보면 당연한 말이다. 추운 날씨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것과 뜨거운 여름 한 낮에 같은 음료를 마시는 것을 생각해 보면 단박에 알 수 있지 않는가? 이 말을 평가의 객관성을 높이라는 뜻으로 해석하지 않기를 바란다. 물론 환경요소를 최대한 배제하고 그것 자체의 특성과 장단을 평가하려는 마인드를 가져야 하지만, 그럼에도 환경요소의 영향을 100% 없앨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나는 이렇게 평가해’라고 말할 때 그가 어떤 환경요소의 영향을 받았는지를 이해하고 그의 평가를 존중하는 태도가 더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또한 ‘나는 객관적으로 평가해’라고 자신만만해하기보다 본인 주위의 환경이 평가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인정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각자의 ‘입장(立場)’은 각자가 처한 환경에 따른 평가이다.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환경을 이해하고 수용한다는 뜻이다. “이 차는 객관적으로 꽝이야”라고 대번에 평가 내리기 전에 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읽고 내가 소유한 차를 ‘옹호’한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물론이다. 나는 ‘이 차를 소유한’ 환경 조건 하에 있으니까 팔이 안으로 굽을 수 밖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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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28일(월) 유정식의 경영일기


<8월의 크리스마스>는 잊을 만 하면 한번씩 보곤 하는 영화다. 딱히 세보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열 번 이상은 본 듯 하다. 잔잔한 스토리와 절제된 대사, 그리고 영화 전반에 흐르는 음악이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다. 매번 주인공 ‘정원(한석규 분)’의 심정에 빙의가 되어 나라면 그렇게 죽어가는 상황에서 ‘다림’을 어떻게 바라볼까 상상해 보며 엔딩 타이틀이 올라갈 때까지 가슴 먹먹함을 ‘즐기곤’ 한다.


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배경이 된 ‘초원사진관’의 모습을 또렷이 기억할 것이다. 정원이 더운 여름날에 창문을 닦던, 다림이 유리창 너머로 ‘나, 들어가도 돼요?’라고 입모양으로 정원에게 묻던, 갑자기 연락이 끊긴 정원에게 화가 나 돌로 유리창을 깨뜨렸던 바로 그 초원 사진관은 그 모습이 정겹거니와 자칫 지루할 법한 스토리를 팽팽하게 유지시키는 영화적 장치이기도 하다. 


어제 우연히 어떤 예능 프로그램에서 군산을 소개하는 내용이 방영되었다. 군산의 명소 중 하나인 초원사진관을 방문한 출연자들은 감탄해 하고 영화 속 정원과 다림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이야기를 추억하며 사진관을 둘러 보았다. 한번 가봐야지 하다가 여태 가보지 못한 나는 반가운 마음에 화면을 주시했다가 이내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음, 뭔가 다른데…’ 영화 촬영 후에 철거된 초원 사진관을 군산시가 복원해서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는데, 영화 속 사진관과 비슷하긴 하지만 내 눈에는 크게 달라 보였다.


현재 재현된 초원사진관



영화 속의 초원사진관

영화 속 초원사진관



어떤가? 비슷해 보이는가? 아니면 아주 다른가? 일단 ‘초원사진관’이라는 간판부터 영화 속 간판과 폰트가 다르고 모양도 달랐다. 난 여기에서 바로 ‘빈정’이 상했다. ‘복원을 했다더니 이런 수준이구나.’ 영화 촬영지를 시에서 매입하여 복원한 것 자체는 영화 팬들에게 추억을 선사하는 일이라 매우 칭찬 받아 마땅하나, 그 ‘부족한 디테일’은 이번에도 여지 없었다. 간판은 사진관의 이미지를 가장 크게 좌우하는 오브제인데, 그것부터 실제를 충실히 복원하지 않았으니 나머지는 볼것도 없었다. 


게다가 창문에 떡하니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커다란 글씨는 왜 붙어 있는 걸까? 산수가 좋은 계곡 바위에 마음대로 새겨 넣은 낙서 같아 보였다. 초원사진관이라는 간판 글씨 자체가 바로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를 상징하건만 그렇게 써 넣어야만 할까? 그것으로 부족했는데 간판 옆에도 작게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지’라고 써 놓았다. 더욱이 왜 그렇게 많이 세워 놓았는지, 사진관 양 옆을 어지럽게 하는 홍보물도 볼썽사나웠다. 그런 홍보물이 영화 속 장면을 떠올리는 데 커다란 방해물이란 생각은 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이러한 디테일의 부족, 아니 디테일에 대한 무신경함은 우리나라 여러 관광 명소에서 ‘항상’ 발견된다. 안동의 하회마을도 마찬가지다. 셔틀버스를 타고 마을 초입에 들어가면 음식점들과 기념품 상점들, 박물관이 사람들은 먼저 맞이한다. 여기저기 메뉴를 써넣은 입간판들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는 광경은 이내 눈살을 찌뿌리게 만든다. 명색이 우리나라 최고의 명소 아닌가? 폰트의 일치는 기대하지도 않지만, 저마다 바탕색도 다르고 크기도 제멋대로라서 한옥마을에 들어왔다는 생각보다는 어디에나 있는 음식점 거리를 걷는 기분이어서 머물고 싶은 마음이 처음부터 싹 사라져 버렸다. 전라도 낙원읍성에서도 이벤트에 사용됐다가 쓸모없어진 물건들을 한옥 뒷편 마당에 쌓아 놓아두는 ‘간편한’ 해결책에 잠시 어이가 없었다. 물레방아도 철근이 그대로 노출되어 조악하기 그지없었다(조선시대 때 그런 철근이 존재했었나?).




스위스 레만 호수가에 있는 작은 도시 몽트뢰는 전 세계에서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다. 바로 그룹 <퀸Queen>의 리더였던 프레디 머큐리의 동상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레만 호수를 향해 다리를 벌린 채 팔을 쭉 뻗고 있는, 그가 공연에서 자주 연출하던 포즈를 실제 크기로 만들어 놓은 동상에서 관광객들은 기쁜 표정으로 기념촬영을 한다. 동상에 대한 설명은 돌 위 동판 위의 글씨가 전부다. 달랑 동상만 서 있음에도 매년 동상을 보러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상당하다. 이 동상이 우리나라에 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 본다. 동상 주위에 프레디 머큐리의 동상임을 플랭카드로 써놓고, 동상 좌우로 홍보 입간판들이 도열을 했을 게 뻔하지 않을까? 


김연아 동상 (출처: 한국일보 http://www.hankookilbo.com/v/123c0b8a494a42409e8bb440301da404)



얼마 전 피겨선수 김연아의 동상이 인천공항 입국장에 세워져 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사진을 보니 평창 올림픽 홍보 차원에서 급조하여 만든 티가 역력했다. ‘너무 못생겼기’ 때문이다. 얼굴도 그렇고 포즈도 그렇고 김연아랑 비슷한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깨진 얼음 모양 위에 세워진 모습도 실소를 유발했다. 누가 기획했는지 안다면 혼을 내고 싶을 정도였다. 헛돈도 이런 헛돈이 없다. 돈을 적게 들여 빨리 만들어 내는 것만 중요했던 모양이다. 몇 년 전에 군포시가 5억원 넘게 들여 김연아 동상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아 엄청난 빈축을 산 적이 있는데 어김없이 또 이런 것이다. 이렇듯 사람들의 눈을 어지럽히고 미적 감각까지 무감각하게 만들어 버리는 홍보물이나 조형물들이 우리 주위엔 너무나 많다. 거의 공해 수준이다.


‘빨리빨리’ 문화에 ‘보여주기식’ 지자체 홍보 마인드가 결합되어 오늘도 이곳저곳에서 GMO 작물처럼 번져간다. 뭐 하나라도 제대로 만들 생각보다는 빨리 만들어서 빨리 보여주고 빨리 성과를 내야 한다는 GMO적 발상이 지긋지긋하다. GMO로 인해 예술이 죽어간다. 그리고 하나 더! 우리는 왜 그런 못생긴 조형물과 홍보물과 소위 ‘관광 단지’를 참고 견디는가? 인문학적 소양이 중요하다면서 왜 실생활에서 스토리를 보존하고 디테일에 충실하려는 인문학적이고 예술적인 행동은 왜 발현하려 하지 않는가? 그냥 이 정도면 됐지, 뭐. 이 정도면 감지덕지지'란 생각이 졸속 행정과 단기적 시각의 경영을 방임한다. 더군다나 우리의 심미안과 예술적 소양을 해친다. 방임하고 한술 더떠 '감동하는' 순간 우리는 그런 '무 디테일'의 GMO 조형물의 공범이 된다. 그러니 우리는 달라진 초원사진관을 보고, 엉성한 안동 하회마을의 기념품 가게를 보고, 김연아를 사칭하는 동상을 보고 분연히 분노해야 한다.


"음, 경영의 시각으로 뭔가 더 코멘트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 글을 읽고 나서 H군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공무원들이 경영 마인드가 없다라든지, 뭔가 문제의 원인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요? 경영일기라면서요."

나는 살짝 화가 났다.

"왜 내가 항상 그렇게 진단해주고 해결책을 제시해야 하죠? 이 글의 핵심 메시지는 우리가 그런 조악한 조형물과 홍보물의 고객으로서 당연히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거에요. 고객이 왜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까지 알려줘야 하죠? 제대로 분노할 줄 알아야 그들이 앞으로 그런 조악한 행위는 하지 않을 거란 말입니다. 그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자는 거죠. 그게 핵심입니다."

H군은 "알겠어요."라며 쿨하게 대답했다. 쿨한 게 매력이다. 엄지 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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