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목마와 숙녀   

2011. 5. 5. 00:14






검은 목마와 숙녀
 
 
 
입김 한줄기가 얼어붙는다
검은 길을 여는 눈먼 자동차들이 검은 바퀴 자국을 남길 때
방울소리조차 잃은 눈먼 목마는 다가와
검은 별로 떠난 숙녀의 시절을 이야기한다
 
 
가고 오지 않을 시간에 대하여
혹은 내게서 잊히지 않았을 맹세에 대하여
검은 숨을 토하며 목마는 잊으라 한다
 
 
숙녀의 별은 이미 술잔 속에서 사라졌노라고
대륙을 달리는 바람처럼 스치어 오고 스치어 갈 뿐이라고
검은 여류시인의 늙은 손가락에서조차 기억되지 않노라고
 
 
별이 사라진 술잔 안에서 슬픈 통증이 떠오른다
슬픔의 질량...
 
 
검은 목도리를 한 채로 검은 잠에 빠질 때
기울인 술잔에서 별이 떨어질 때
우리가 바라보던 숙녀의 검은 눈동자는
시절의 어둠 속으로 무너져 내렸다
 
 
잊혀진 대로 사는 일이 인간의 숙명인 것을
그저 회고록의 마지막 페이지처럼 쓸쓸한 것을
은하의 변방에서 울리는 방울소리처럼 아득한 것을
 
 
상심한 뱀이 늦가을의 절망을 피해 은둔하듯
우리는 늙은 숙녀의 눈에 입을 맞춰야 한다
쓰러진 술병을, 쓰러진 인생을 소리없이 기억해야 한다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를 모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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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하현달   

2011. 4. 16. 10:00




하현달



어둠 속으로 기억이 가라앉는다. 밤의 서풍은 동쪽으로 쌓이고 언덕 아래로 기억이 흘러내린다. 잊을 수 있을 때 잊었으면 좋았을 기억이다. 떠날 수 있었을 때 떠났으면 좋았을 기억이다. 기억은 결이 엉킨 채로 서풍 따라 구르고 어둠을 몰고 다니는 그는 늘 여윈 눈이다. 상실은 늘 나의 몫이고 한때의 기억은 하현달처럼 빛을 잃는다.

누워 어둠 속의 어둠을 본다. 어둠 속의 어둠 같은 그를 본다. 어둠 속의 어둠 같은 그의 기억을 본다. 그는 내게 어둠으로 입맞춘 기억 한조각을 건네고 느리게 돌아눕는다. 그는 만져지지 않는 기억이고 만져서도 안되는 기억이다. 그는 언제나 그랬다. 언제나 슬플 것을 염려하며 언제나 떠날 때를 가늠했다. 언제나 어둠 같은 표정으로 하현달 같이 웃었다. 언제나 손을 먼저 거두고 언젠가 만날 것을 먼저 약속했다.

무모함은 어리석음보다 슬픈 법. 파란 공중전화 앞에 얼어가던 그 겨울날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행복했을까? 자정을 넘어 어둠보다 더 어둔 역으로 몸을 누이던 그날의 석탄차는 내 무모함의 상징이었을까? 나는 젊었지만 여위고 가난했다.

방백을 듣는 관객인 양 그는 하현달의 상실만을 응시한다. 어둠보다 더 어둡게 귀를 닫은 채 일 밀리미터씩 밀리는 서풍처럼 언덕 아래로 구른다. 기억 따윈 존재하지 않는 무덤인 양 천천히, 그는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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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과의 화해   

2010. 11. 27. 02:30




아침과의 화해


아침은 한낮의 오만함 끝에
저녁 무렵 긴 그림자 내려놓고
야윈 등을 보인 채 멀어진다
그만 화해하자는 미소를 내게 보였지만
난 모른 척 시계만 들여다 보았다
얕게 숨을 쉬면서, 믿음 따윈 믿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길을 잃은 건 나지, 나의 아침이 아니다
한밤 중 어지러운 눈으로 찬물 들이키고
어둠이 그대로 아침이기를 바랬던 나지,
가엾은 아침이 아니다

떠나는 아침에게는
편지지 위 한 방울 눈물 같은 냄새가 난다
내 분노에 놀라 급히 흘린 그의 눈물이다

마른 눈물 자국처럼 어둠이 접힐 때
어둠 속 나는 아침이 그립다
나를 떠난 아침은
입 다문 지평선 너머로 쉴 참도 없이 길을 가겠지
 
내 분노가 식고
내 용서가 너를 맞이할 때까지
고된 길을 가고 또 가겠지

아침이 오면
나는 바란다, 시간이 존재하는 한,
너와 나는 꿈이 아니기를,
차마 슬픈 현실이기를



* 1999년 어느 날,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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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likinijus.com BlogIcon 리키니쥬스 2010.11.27 15:26

    이런 감수성있는글을 보니 색다르군요~^^ㅎㅎ

    perm. |  mod/del. |  reply.

그 도시   

2010. 1. 13. 00:44



그 도시



한 일자(字)로 입을 다문
무덤과 무덤의
거대한 서식처


인류들의 얼어붙은 침묵 사이로
풀-풀- 떠돌았다
가슴 아픈 이름만으로
창백한 도시를

 
바람 따라 부유하던 내 발 너머
슬픈 초상인 양 흩뿌려진
안개,
안개성(城)


요통을 앓으며 내려앉던
4시의 하늘 아래
오로지 죽음 앞에서만
꺼질 수 있는 인연의 잔염(殘炎)을 느끼며,
흘러만 내리는 생의 비감을 쓸어 넘기며


나는,
나는,
미상(未詳)의 도시에서 이윽고 살아남은
미상의 목숨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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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소리   

2009. 11. 28. 01:04

겨울의 소리



메조소프라노와 나는 사랑을 한다
시절이 깊어져 눈 내릴 때면
낮은 음 하나 밀며 가는 몸짓을 나는 기억한다

찬 입김이 성에가 될 때
그 날, 잠길 듯한 안개의 속살 같이
소리 없는 노래 위에 입술을 댄다

가느다란 숨 몰아 쉬며 나는 돌아눕는다 
무제(無題)의 계절과 나의 이연(異然)은
더 이상 회상되지 않는다
오로지 낮게 사라질 뿐, 그 날,
손 건네고 받은 찬 손과
고개 숙여 안기는 이마와 
그 위로 녹아 내리는 눈처럼
오로지 높이 휘날릴 뿐이다

메조소프라노와 나는 사랑을 한다
머무는 바람의 저향(低響)같이
숲을 헤치는 울림같이
아픈 겨울 소리를 공명하며
함께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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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4known.tistory.com BlogIcon 대흠 2009.11.29 10:28

    요즘은 트위터에 빠져서 블로그 돌아다니는 일을 소홀히 했는데... 오늘 일요일 아침, 그 언젠가 처럼 또 정식님의 블로그의 좋은 시와 사진에 빠지는군요. ^^

    perm. |  mod/del. |  reply.
    • Favicon of https://infuture.kr BlogIcon 유정식 2009.11.30 09:51 신고

      저도 트위터 때문에 분산되어 블로그가 좀 부실해졌습니다. ^^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행복하고 재미있는 하루 되세요!


창가에 기대어 하늘을 본다



11월이 간다
잎을 잃은 나무는
늙은 병정마냥
헐벗은 시절을 지키고 섰다

하늘을 본다
타워크레인으로 반쯤 가려진 하늘은
제 빛을 잃고 제 높이를 잃은 채
구름 아래로 누웠다

길이 흐른다
잿빛 연무 사이로 음향을 잃은 자동차들이
사람조차 잃은 거리를 흐르다가
각기 다른 서식처로 고인다

창가에 기대어 하늘을 본다
늙은 병정의 기침처럼 앓는 얼굴이다
찬 바람에 나뒹구는 11월은
타워크레인 끝에 걸린 채로
얕은 어둠에 잠긴다

제 색을 잃고 제 깊이를 잃은 시절이
1밀리씩 흐른다
11월이 이렇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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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uverin 2009.11.23 16:14

    계절 타시는건가....^^;

    perm. |  mod/del. |  reply.

그 날, 그 시(時)   

2009. 11. 20. 23:53

그 날, 그 시(時)


어둔 낯빛으로 하늘이 내려 앉고
피곤이 습관이 된 사람들은 목을 꺾는다


검은 다리, 흰 다리, 또는 하나뿐인 다리들이
집으로 향하는 시간


이 시간들이 쌓여 시절이 되고
시절이 상처되어 이 땅에 딱지처럼 앉는다면
멀고 먼 그날, 그시
존재는 드디어 무거운 마침표를 찍는다


모두들 바쁘게 살고
모두들 바쁘게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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