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가르치면 똑바로 알아 들어야지!   

2008. 5. 23.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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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를 제대한 후 복학하기 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서 나는 자동차 운전 면허나 따볼까 해서 강남 삼성동에 있던 어느 운전면허학원에 등록을 했다. 그때만 해도 삼성동은 개발이 덜 이루어져서 운전학원은 지금의 포스코 사거리 근처에 있었다. 그래도 강남이라서 그런지 다른 곳보다 학원비가 좀 비쌌던 걸로 기억되는데 친구와 같이 수강하느라 비싼 수강료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지도해 주던 사람은 짤막한 키에 머리가 조금 벗겨지고 배가 나온 남자였다. 기껏해야 30대 초반처럼 보였다. 난생 처음 운전대를 잡아 본 나는 기어를 어떻게 넣어야 하는지 브레이크와 엑셀레이터를 각각 어떤 강도로 밟아야 하는지 몰라서 처음부터 그 사람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언덕 위로 올라가서 잠시 정차 후 다시 출발할 때는 클러치를 너무 빨리 해제하는 바람에 시동이 꺼지고 뒤따라오던 다른 차와 부딪힐 뻔만 적도 몇번 있었다. 또 후진할 때 엑셀레이터를 깊게 밟아서 차가 휙 돌아가는 사태도 발생했었다. 왕초보로서 사고칠 껀 다 해 본 셈이다.

내가 그렇게 버벅거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덤벙거리는 나의 성격 탓이기도 했지만, 날 가르쳐주는 사람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차에 올라타자 마자 '왜 그것도 못하냐, 제대로 못할 거라면 그만 두라'며 윽박지르기 일쑤였다. 가뜩이나 온 몸이 긴장 상태에 있는 내게 소리까지 벅벅 질러대니 잘 될 리가 만무했다. 반항심이 생겨서 옆에서 떠들거나 말거나 일부러 그사람이 가르친 것과 거꾸로 하는 오기도 부렸다.

처음에는 그사람의 독특한 지도법이려니 하고 꾹 참고 넘어 갔다. 내 돈 내고 그런 수모를 당하는 게 억울하지만 며칠만 참자고 수없이 다짐했다. 하지만 나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그의 말이 발단이었다. 어디서 낮술을 한잔 걸쳤는지 그의 입에서는 시큼한 술냄새와 김치 냄새가 났다. 그는 나를 보더니 다짜고짜 "나이도 어리면서 어른이 이야기하면 잘 들어야지, 왜 못 알아 듣냐? 당신, 대학생인거 맞아?" 라며 연신 콧방귀를 뀌더니 빨리 차나 몰라며 턱짓을 했다.

'이젠 대놓고 반말을 하면서 인신공격까지?' 참아보려고 했지만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나는 도저히 그와 같이 있을 수가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그 얼굴을 향해 그동안의 한을 담아서 한 대 갈기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었던 최상의 보복은 여러 차들이 꼬리를 물고 돌아다니는 트랙 한 가운데에 차를 그냥 세워두고 키를 뽑아서 멀리 던져버리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것은 참 멋진 보복이었다. 힐끗 뒤를 돌아보니 그사람은 차 지붕을 손으로 쾅쾅 내리치며 얼굴이 붉으락푸르락이었다. 나는 속으로 이제 당신 같은 사람이 볼 일 없다며 학원을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며칠 후, 필기시험은 무난하게 합격했지만 실기시험은 보기 좋게 떨어지고 말았다. 역시나 언덕이 문제였다. 당황한 탓에 클러치도 떼지 않은 채 엑셀레이터만 연신 밟아댔다. '유정식 씨, 불합격입니다. 사이드 채우고 내리세요!" 목소리가 매우 단호했다. 쿠션과 면장갑을 단단히 챙기며 대기하던 아줌마들은 수고했다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나는 그 후로 꽤 오랫동안 내 불합격의 모든 책임을 학원강사에게 돌리며 분한 마음을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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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회적이든 개인적이든 매일 누군가를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를 한다. 꼭 교사나 강사라야 가르칠 수 있는 건 아니다. 하다못해 거리에서 길을 묻는 사람에게 길을 가르쳐주는 일도 '지도'라 말할 수 있다. 만일 "100미터 가다가 우회전한 다음에 샛길로 50미터를 더 가세요."라고 말하면 듣는 사람은 아리송해 한다. "가다가 OO병원이 있는 사거리에서 우회전한 다음 XX마트가 나오는데, 그 맞은 편에 있어요"라고 말해야 금방 이해가 된다는 것쯤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생각처럼 쉽지 않은 것이 다른 사람을 지도하고 가르치는 일이다.

이제 지나간 옛일이지만, 나는 가끔 그 일이 떠오를 때마다 다른 사람을 어떻게 가르치고 지도해야 하는지 생각한다. 그 학원강사처럼 극단적이지는 않더라도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노하우를 누군가에게 가르칠 때 상대방을 하대하고 비웃고 무시하지 않았는지 돌아보게 된다. 또는, 나만의 지적 유희에 취해서 상대방이 알아 듣건 말건 난해하고 현학적인 태도를 보이진 않았는지 반성하게 된다.

누군가를 가르치고 지도하는 일은 나를 낮추는 '겸손'에서 시작하며, 자신을 낮추어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출 때 제대된 지도가 이루어진다. 지식과 스킬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가르침의 9할은 겸손이다. 겸손해지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자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청자(聽者)가 누구인지 파악하는 일이다. 그래야 어떤 수준으로 자신을 낮춰야 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가르침 = (1*지식) + (9*겸손)

부모가 아이를 가르칠 때 '이것도 모르냐'며 매를 든다면 우리는 아이를 탓하기보다 아이의 눈높이를 무시한 부모를 탓한다. 그렇듯이 지도를 받는 사람이 배운 바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제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면 그 책임은 1차적으로 지도를 한 사람이 져야 한다.

아무리 뛰어난 아이디어나 지식도 상대방을 이해시킬 수 없다면 그저 책 속에나 존재하는 이론에 불구하다.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 학문적 도취에 빠져 뭇사람의 이해능력을 비웃으며 더욱 난해한 이론의 벽을 쌓아가곤 하는데, 아인슈타인은 달랐다. 그가 발견한 '상대성 원리'는 우리가 우주를 바라보는 직관과 배치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 관찰자의 시각에 따라 측정 결과가 달라지고 시공간이 휘어졌다는 아인슈타인의 통찰을 오늘날의 사람들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일반인들이 상대성 원리를 쉽게 배울 수 있도록 책을 썼는데 '상대성 : 특수이론과 일반이론'이란 책은 지금까지 상대성 원리의 입문서로 많이 읽히고 있다. 그는 자신의 의붓딸인 마르코트에게 이론을 가르쳐주면서 그녀가 정말 이해하는지 일일이 확인하는 방식으로 책을 썼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의 위대성이 더욱 빛나는 이유이다.

나는 가끔 운전학원의 그를 떠올리며 가르치는 자로서 내가 겸손하지 않았는지 돌아본다. 공자가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으니, 그 중에 선한 자를 가려서 따르고, 그 선하지 못한 자를 가려서 자신의 잘못을 고쳐야 한다 (子曰, 三人行必有我師, 焉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라고 했던가? 이제는 그를 '겸손이 가르침'의 시작임을 일깨워 준 악한 스승으로 여겨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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