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ism 12] My Room   

2009. 6. 9.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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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내 어둔 방의 불을 켠다.
신발을 벗고, 가방을 내려놓고, 자켓을 벗어 옷장에 걸고,
냉장고를 열어 찬물을 한컵 들이킨다.

안경을 벗어 눈을 비비고, 이 방의 침묵을 깨뜨리려고 보지도 않을 TV를 켠다.
침대에 걸터 앉아 심각한 표정을 하고 뉴스를 전하는 여자앵커의 눈에
내 눈을 맞춘다. 그녀의 눈의 깜박임이 몇번인지 세어본다.
한번, 두번, 세번...
오늘도 몇몇이 무슨무슨 이유로 어찌어찌 했다는, 똑같은 포맷의
단신들을 들으며 그처럼 평이한 나의 하루를 잠깐 회상한다.

누구인지 모르는 전화가 온다.
"거기 어디어디 맞죠?"
잘못 걸린 전화가 요즘에 많아졌다. 그리고 대부분 같은 사람의 목소리다.
내가 싱가폴에 가 있는 동안 자동응답기에 여러 차례 녹음된 그 목소리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거짓쪽지를 전해준 탓이겠지.
"전화해요, 여기로" 
나는 잠시 웃음 몇 가닥을 바닥에 흘린다.

하루의 냄새가 밴 옷을 벗는다.
뜨거운 물을 온 몸에 쏟는다.
Ravel의 '죽은 황녀를 위한 파반느'을 허밍으로 부르면서
내가 나의 밖으로 보여줘야 했던 거짓과 오만을 씻는다.
지금 이 순간은 본래의 나와 화해하는, 나만의 시간.

샤워를 하고 난 후 내 피부의 물기가 말라갈 때의 느낌이 좋다.
그 느낌과 함께하는 John Mills의 기타 소리가 좋다.

낮 동안 비어있던 방에 나 하나로 인해 엷은 생기가 돈다.
둘이 아니어도 좋다. 내가 만져주고, 내가 눈길을 줄, 이 빈방의 물건들,
나에게로 와 내 외로움을 닮아가는 것들, 그들이 나와 함께 있으니까.

내가 없는 동안, 이 빈 방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궁금해진다.
빈 방을 처음 들어설 때의 무거운 침묵은
아마도 소란스러움의 급격한 입막음일지도 모르지.
그래서 나는 빈 방을 들어서면서 "잘 있었어?" 라고 말하기를 좋아하게 됐다.
짐짓 그것들이 경계를 풀고 다시 살아나 나에게 말을 걸어 주기를 바라는 듯이.

내가 밖에 있어도 철저히 나를 위해 준비된, 철저한 빈 방 하나 가졌다는 것은
삶이 나에게 준 얼마 안되는 행복감중에 하나다.

아, 그러고 보니 잊은 게 있다. 내 빨간 작은 차.
그 빈 차에도 인사하고 와야겠다.
"잘 있었니?" 라고.


** 11년 전 일기를 들춰보다가 뽑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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