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가르친다는 것에 대해   

2010. 2. 1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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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지금 누군가를 가르치는 중입니까? 가르치면서 어려움을 느끼진 않는지요? 가르침을 직업으로 하지 않더라도 길을 묻는 사람에게 길을 가르쳐 주는 일일지언정 우리는 '가르치는 자'의 위치에 자주 서게 됩니다. 오늘은 남을 잘 가르친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잘 가르치는 사람은 지식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사람입니다. 눈 감고서도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의 눈에 생(生)초보가 얼마나 한심할까요? '내'가 하면 1시간이면 뚝딱 해치울 일을 1주일 내내 붙잡고 끙끙거리는 부하직원을 보면 얼마나 가슴이 터질까요? 

가르치는 자 중에서 겸손하지 못한 자는 화가 앞서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 그것도 못하냐며 윽박지르고 상대방을 비하합니다. 혹은, '네가 나의 깊은 뜻을 알기나 하겠어' 라며 업신여기거나 무시합니다. 


하지만, 가르치는 자의 이런 태도는 가르침을 받는 사람을 스스로 깨우치게 만들지 못합니다. 반발하고 저항할 뿐입니다. 인간은 감정이 이성을 압도하는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낮출 줄 모르는 사람은 남을 가르치는 일에 실패하고 맙니다. 

부모가 아이를 가르칠 때 ‘이것도 모르냐’며 불같이 화를 내며 답답해 하거나 급기야 매까지 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아이가 하나의 개념을 받아 들이려면 수백 번의 반복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기다려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급하게 가르치려는 태도는 자녀에게 과도한 스트레스를 주게 되고 심하면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기도 합니다.

피아니스트이자 음악 교육자인 로린 홀랜더(Lorin Hollander)는 어렸을 적에 자신에게 지나치게 높은 수준을 요구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 세우는 선생님들 앞에 설 때마다 너무나 공포에 떤 나머지 몇 년 동안 손가락이 마비되어 펴지지 않는 증상을 앓기도 했습니다.

난방장치의 온도조절장치를 20도에서 25도로 높인다 해도 25도에 도달하려면 시간이 소요됨을 우리는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추운 날 차를 출발하기 전에 워밍업을 해야 한다는 걸 누구나 압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가르치거나 지도할 때는 참을성을 종종 상실하죠. “왜 내가 말한 대로 안 해?”라며 즉각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상대방의 미숙함을 자신의 지시에 대한 반항으로 오해하고 못살게 굽니다. 

올바른 가르침은 배우는 자가 습득할 시간을 기다려주는 인내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배운 바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제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면, 그 책임은 1차적으로 가르친 사람이 져야 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아이디어나 지식도 상대방을 이해시킬 수 없다면 그저 책 속에나 존재하는 이론에 불과합니다.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이룩한 업적에 도취되어 일반인들의 낮은 이해력을 비웃으며 더욱 난해한 이론의 벽을 쌓아가곤 합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달랐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위대성은 그의 가르치는 자세에서도 빛을 발했습니다. 그가 발견한 ‘상대성 원리’는 우리가 우주를 바라보는 직관과 배치됩니다. 관찰자의 시각에 따라 측정 결과가 달라지고 중력에 의해서 시공간(時空間)이 휘어진다는 아인슈타인의 통찰을 오늘날의 사람들도 잘 이해하지 못하죠. 

그래서 그는 일반인들이 상대성 원리를 쉽게 배울 수 있도록 책을 썼습니다. ‘상대성 : 특수이론과 일반이론’이란 책인데, 이 책은 지금까지도 상대성 원리의 입문서로 많이 읽힙니다. 그는 자신의 의붓딸인 마르코트에게 상대성 원리를 가르쳐주면서 그녀가 정말 이해하는지 일일이 확인하는 방식으로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패서디나에는 ‘파인만 도형’이라고 불리는 그림 여러 개가 그려진 자동차가 전시돼 있습니다. 그 자동차는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이 생전에 가족들과 여행을 다닐 목적으로 사용했던 누런 색 밴입니다. 

이 파인만 도형(전자와 같은 입자가 서로 접근하다가 광자를 교환하면서 상호작용한 후에 서로 멀어져 감을 나타내는 그림)은 복잡한 수학 계산 없이도 원자 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쉽게 통찰하도록 해 주는 파인만의 발명품입니다.

동료 교수이자 경쟁 상대이기도 했던 줄리언 슈윙거 (Julian S. Schwinger)가 수백 개의 난해한 수학식을 써서 유도해 낸 물리학적 의미를 파인만 도형은 간단하게 전달합니다. 이 도형은 오늘날에도 물리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데 큰 가르침을 줍니다. 파인만 도형이 없었더라면 많은 물리학도들이 골머리를 무지 썩었을 겁니다. 파인만 도형은 위대한 학자일수록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예입니다.

허나, 슈윙거는 “파인만 도형이 계산을 대중에게 주었다”라고 말하며 이 도형의 가치를 폄하하곤 했습니다. 파인만이 과학의 고귀함과 성스러움을 깎아 내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현학적인 글을 보면서 얼마나 절망합니까?

‘버스 정류장의 전형적인 월요일’ 같은 정신적 지도는 물리적 사물로 표상될 수 없다. 이러한 표상은 물리적 공간은 물론 시간, 관계, 행동들까지 포함한 표상이다. 그러한 고등한 코드는 또 다른 면에서 인체 지도와 같다 (데이비드 베레비著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에서)

도무지 의미를 알 길이 없습니다. 글자 하나하나는 정확히 읽혀도 뜻을 종잡을 수 없습니다. 글을 읽는 사람의 이해력은 전혀 안중에 없는 오만한 가르침은 어떤 면에서 '지적 폭력'은 아닐까, 란 생각까지 하게 만듭니다.

쉽게 가르치는 것이 어렵게 가르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인내하며 가르치는 것이 군림하고 몰아 세우며 가르치는 것보다 더 힘듭니다. 여러분이 지금 누군가를 가르치는 입장에 있다면, 가르침은 곧 겸손이고 인내임을 가르치는 내내 마음 속에 담아두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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