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의 무지에 빠진 정부 관리들   

2008. 5. 13.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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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우병 사태로 정부가 우왕좌왕하고 있다. 미국 정부의 보도자료에서 동물성 사료 사용 금지 '완화'를 '강화'로 잘못 번역한 사건을 보면서 허탈함을 금할 수 없다.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아니 적어도 그러리라 기대되는 정부의 많은 이들이 어째서 그런 오류를 발견하지 못했을까? 그렇게 중요한 사안을 왜 아무도 확인하거나 검증하려 하지 않았을까? 참으로 무지(無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그것은 다수의 행동이나 의견에 조직의 행동전략을 일임해 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몇몇 사람이 '완화'를 '강화'로 잘못 해석해 냈을 때, 이를 본 다른 사람들은 각자 '저 사람들(다수)가 저렇게 말했으니까 옳을 거야. 확인할 필요가 없겠지?'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정부 관리들의 잘못을 두둔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나, 나는 이와같이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한 원인이 '다수가 항상 옳다'는 사고의 관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개인 혹은 집단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아보기 위해 심리학자들이 한 가지 실험을 고안했다. 어떤 사람을 시켜 거리에 우두커니 서서 60초 동안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 보도록 했다. 관찰 결과, 대부분의 행인은 그냥 지나치고 4% 정도만이 그 사람을 따라서 하늘을 올려다 봤다.

그런데 실험자(하늘을 올려다 보도록 지시 받은 사람)의 수를 늘릴수록 따라 하는 행인의 비율이 점점 커졌다. 15명의 사람에게 하늘을 올려다 보도록 하면 행인의 40%가 그들을 따라서 했다. 이 실험을 통해 사람들에게는 다수의 행동이나 의견을 별 고민 없이 옳다고 믿는 경향이 있음이 증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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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이 다수를 기준으로 나의 행동이나 의견을 판단하는 것을 ‘사회적 증거(Social Proof) 현상’라고 하며, 다수의 의견을 따라가다가 잘못된 선택하는 경우를 ‘다수의 무지’라고 부른다.

다수의 무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을 예로 들어 본다. 제노베스라는 20대 후반의 처녀가 뉴욕시 퀸스지역에서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괴한에게 칼을 맞아 살해된 사건이 있었다. 강력범죄가 많은 뉴욕시에서는 단신에 불과할 사건이 엄청난 후폭풍을 일으켰는데, 그 이유는 38명에 달하는 목격자들이 한 여자를 세 차례나 습격하여 칼로 찌르는 장면을 물끄러미 구경만 하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 때문이었다.

많은 이들이 대도시 생활의 인간성 파괴와 TV 폭력 등의 탓으로 돌리며 분개했으나, 실은 인간의 복잡한 심리에 의해 불행한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38명이나 되는 목격자들은 불쌍한 제노베스가 공격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경찰에 신고할까 말까에 대한 갈등에 쌓이게 됐다.

이 때 각 목격자들은 그와 같은 불확실한 상황 하에서 독자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려 행동에 옮기기 보다는 자기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목격자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먼저 관찰했다. 목격자들은 자기 이외에 목격자들이 짐짓 무관심한 듯 창을 닫고 불을 끄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똑같이 행동했던 것이다. 제노베스가 죽어 가는데도 태연히.

이 이야기는 로버트 치알디니가 쓴 '설득의 심리학'에 나온다. 저자는 불확실한 상황 - 신고할까 말까의 상황 - 에 놓이게 되면 사람들은 옳은 방법을 마련하기에 집중하는 것보다 불확실한 상황 그 자체로부터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 해결책으로 주변인들을 관찰하여 비슷한 행동을 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이른바 '다수의 무지'라는 모순적 현상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정부 관리들도 미국의 압박과 국민들의 저항 사이에서 어쩔 줄을 몰라 우왕좌왕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런 불확실하고 불안한 상황에서 미국 정부가 내놓은 동물성 사료 사용 금지 '강화'라는 말이 얼마나 반가웠을까? 잘못 해석했으리라는 생각은 눈꼽 만큼도 하지 않은 채 그걸 굳게 믿고 국민에게 미국 쇠고기는 안전하다고 선전하고 말았다.

상황이 급박하고 불안정할 때는 이런 '다수의 무지'에 빠질 위험이 매우 크다. 정부 관리들은 빠른 대처를 한답시고 자신들의 '똑똑함'에도 불구하고 어이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게다가 대통령 특유의 밀어붙이기 식 의사결정이 판단력을 흐리게 했을지도 모른다. 배가 폭풍우에 흔들릴 때 어찌해 보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건 아무 도움이 안 된다. 단단한 기둥을 잡고서 대처할 방법을 차분하게 '생각'하는 게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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