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편견을 가지고 있는데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에게는 대화를 할 때 우리말 용어가 있는데도 굳이 영어로 된 말을 지나치게 많이 섞어 쓰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상대방에 배려심이 적다고 판단합니다. 이게 편견인 이유는 어떤 분야에 오래 근무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영어 용어를 자주 접하고 억지로 한국말로 번역된 용어를 쓰느니 간명하게 영어 단어를 쓰면 의사소통 속도가 훨씬 빠르기 때문이죠.
문제는 제가 그 분야의 사람이 아닌 줄 잘 알면서도 제가 알아들을 수 없는 전문용어를 내뱉을 때입니다. 10년 전 쯤 어느 미팅 때 누군가가 자꾸만 ‘텔코.’라고 하길래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 듣지 못했습니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텔코’는 ‘Telco.’이고 ‘Telecom Company(통신 회사)’의 줄인 말이라는 것을 겨우 알아차릴 수 있었죠.
자기네끼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내뱉는 단어겠지만, 저처럼 통신 쪽엔 문외한인 사람에겐 요즘 젊은 친구들이 자주 쓴다는 ‘강종(강제 종료)’. ‘갠소(개인 소장)’ 같은 외계어나 다름없었습니다. 제가 컨설턴트라고 하니까 그 정도 용어는 알아 듣겠거니 해서 내부인과 대화하듯 편하게 나를 대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이 사람이 나의 배경지식을 과대평가한다’기보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조금 없구만’이라는 편견에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연구에 따르면, 전문용어의 과다 사용은 자신감이 낮음을 자신도 모르게 드러내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연구자는 지위가 낮아서 자신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과 높은 지위에 있기에 자신감이 높은 상황, 이렇게 두 가지 상황을 설정한 다음에 참가자들이 전문용어를 얼마나 많이 쓰는지 살폈습니다.
그랬더니 상대적 지위가 낮은 조건의 참가자들이 상대적 지위가 높은 조건의 참가자들보다 전문용어를 더 많이 사용하려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상대적 지위의 낮음을 전문용어로 보호 받으려는 심리가 작동한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죠. 상대적 지위가 낮은 사람일수록 ‘그가 나를 어떻게 평가할지’에 더 많은 신경을 쓰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여러분은 외부인과 대화할 때 전문용어 사용을 자제하는 편이 좋습니다. 본인이 상대방보다 지위가 낮다는 것을 은연 중에 표현하는 것이니까요. 또한,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일단 상대방이 이쪽 분야의 지식이 별로 없다는 전제 하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몇 마디 주고 받으면서 상대방의 배경지식이 어느 정도 있다고 판단되면 그에 따라 대화의 수준을 상향해야 좋지 않을까요?
*참고논문
Brown, Z. C., Anicich, E. M., & Galinsky, A. D. (2020). Compensatory conspicuous communication: Low status increases jargon use. Organizational Behavior and Human Decision Processes, 161, 274-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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