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레트로 카페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타자기는 20세기만해도 펜을 대신해 규격화된 글을 쓸 수 있는 세기의 발명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덕에 20세기초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가능하게 했던 ‘타이피스트’라는 직업을 탄생하게 했죠.
베티 네스미스 그레이엄(Bette Nesmith Graham)은 평범한 주부였지만 2차대전 이후 전쟁터에서 돌아온 남편과 이혼하게 된 후 홀로 아이를 양육해야 했습니다. 생계 유지를 위해 타이피스트로 일을 할 수밖에 없었죠. 그녀는 뛰어난 타이피스트는 아니었지만 책임감이 강했습니다. 무엇보다 당시 여성들에게 요구하던 전통적이고 의존적인 성향이 아닌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성격 덕분에 조직에서 책임자로 승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승진을 해도 직장여성에게 주어진 일은 '남자'를 보조하는 업무, 그저 타이핑뿐이었습니다.
당시 IBM이 출시한 새로운 모델은 기존의 타자기보다 빨랐고 먹물이 아닌 탄소 필름 리본을 사용하는 새로운 전자 타자기였어요.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새 타자기에 익숙해지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특히 민감하고 빨라진 키패드 때문에 타이핑에 그다지 재주가 없었던 그녀는 더 많은 오타를 만들어냈죠. 오타가 많다보니 상사(남성)로부터 질책을 자주 받았겠죠?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는 처지이기에 보통의 타이피스트라면 밤새 타이핑 연습을 하며 실력을 키울 수 있었겠지만 그녀에겐 그럴 시간이 없었습니다. 일자리가 불안정하다 보니 부업으로 은행 창문에 페인트칠을 하는 일도 해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이때 그레이엄에 머리 속에서 한 가지 아이디어가 번쩍거렸습니다. 타이핑 오타를 감쪽같이 수정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죠. 그녀는 매니큐어병에 수성 페인트를 담아 오타가 생길 때 마다 위에 덧칠을 했고 이런 방법 덕에 그녀는 일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몇 년 동안 수정 페인트를 사용하던 그녀는 다른 비서들에게도 자신이 제조한 수정액을 ‘미스테이크 아웃- mistake Out’이란 이름으로 만들어 팔기 시작했습니다. 이 수정액은 비서들 사이에서 없어서는 안 될 구세주 같은 제품이었지만 수정액을 사용하고 공급하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한 직장 상사는 그녀를 해고해 버렸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베티는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명한 수정액 탓에 직장을 잃고 말았죠.
다행히 그녀는 여기서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믹서기 한 대만을 가지고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비서들 사이에 필수품이 된 수정액을 제조, 공급하는 ‘리퀴드 페이퍼(Liquid Paper)’란 이름의 회사를 창업했던 거죠. 그리고 1979년에 회사를 질레트에 매각하기 전까지 연간 2,500만병의 수정액을 판매하는, 5천만 달러 가치의 회사로 성장시켰습니다. (아쉽게도 1년 후인 1980년 5월에 그녀는 세상을 떠납니다.)
그녀가 그저 자수성가한 기업가이기에 유명한 것은 아닙니다. 알다시피 1960년대에는 그 어떤 대기업들도 직원의 복지에는 관심이 전무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싱글맘으로 살아야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의 복지를 우선시하는 진보적인 업무환경을 조성했습니다.
회사에 보육원(어린이집)을 설치했고 직원 소유의 신용조합을 신설했으며 휠체어 이용이 가능한 작업 현장을 디자인했습니다. 피부색에 따라 차별하는 문화도 철폐했죠. 예술 분야의 여성을 지원하고 불우한 여성을 지원하는 재단을 설립했고요.
지금은 우리가 흔히 '화이트'라고 불렀던 수정액을 찾아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 자리를 수정 테이프로 대체했으니까요 하지만 '지우는 걸' 누구보다 잘했던 베티 그레이엄이 시대를 앞서가는 경영자였다는 사실은 지워지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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