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전 잡지를 읽다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어 이 글을 씁니다. 모 교수가 '삼성이 타 그룹에 비해 유난히 혁신적인 이유'라는 타이틀로 어느 잡지에 기고한 칼럼 때문입니다. 그 칼럼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3남이 기업을 승계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이게 무슨 말일까?' 저는 그 다음에 어떤 말들이 이어질지 궁금했습니다. 그 교수는 여러 가지 예를 들면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더군요. 조선시대 때 업적이 뛰어난 임금들(태조,태종,세종,세조,성종 등) 중에는 장남이 없다는 걸 언급합니다. 그 다음엔 프랭크 설로웨이의 '타고난 반항아(Born to Rebel)'에서 인용한 듯한 사례들을 나열하더군요. 

그 교수는 프랭크 설로웨이가 "장남은 보수적이고 차남은 혁신적이라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내용을 학설로 정립했다"라고 단언합니다. 차남들이 가진 콤플렉스가 긍정적으로 발현되어 혁신적인 사고와 행동으로 이끈다는 이야기죠.

그 교수는 이렇게 칼럼을 마무리를 짓습니다. "그래서 기업의 승계에서 보수(保守)를 원한다면 장남을 택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차남 이하를 택하라고 권고하는 것이다" 그 교수의 글을 읽고 한동안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첫째,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혼동했기 때문입니다. 혁신적인 사람과 태어난 순서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프랭크 설로웨이의 연구 결과를 '차남 이하에게 승계해야 혁신적이 된다'라는 식으로 오해하도록 만드니 말입니다. 

둘째,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오류'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 교수가 자신의 칼럼에서도 언급했듯이 위대한 과학자인 뉴턴, 라부아지에, 아인슈타인은 장남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대체적으로 급진적인 이론에 대한 반대자는 장남이었다"라면서 '차남은 곧 혁신'이라는 논지를 폅니다. 장남이었던 뉴턴, 라부아지에, 아인슈타인은 그저 예외적인 현상이라는 논조가 밑바탕에 깔려 있더군요.

셋째, 극단적인 환원주의적 시각 때문입니다. 혁신의 원동력은 기업마다 매우 다채롭습니다. 그래서 혁신의 비밀을 한 두 가지의 요소로 축약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몸을 이루는 성분이 대부분 단백질이라고 해서 '인간은 곧 단백질'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차남에게 기업을 승계한 것'이 혁신의 유일한 조건인 양 쓴 글은 공학을 전공하는 교수가 썼다고 믿겨지지 않습니다.

넷째, '도대체 뭘 어쩌라구(so what)?'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장남이 승계한 기업의 경영자가 이 글을 본다면 어떻게 느낄까요? "혁신하려면, 그래, 장남인 내가 차남으로 변신하란 말인가?"라며 (저처럼) 잡지를 쓰레기통에 집어 넣을지도 모릅니다. 혁신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지 않은 채 "장남이 승계한 기업은 알 바 아니야"라는 느낌을 주는 글은 독자의 조소만 일으킬 뿐입니다.

애초에 잡지를 읽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 교수가 저에게 일으킨 '조용한 분노' 덕에 할일을 못하고 오후 시간이 허무하게 흘렀군요. '나쁜 글'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비생산적으로 만들고 우울하게 만듭니다.


(추신 : 이 글은 삼성을 비난하기 위한 글이 아니니 오해 말기 바랍니다. 삼성의 혁신이 '3남이 기업을 승계한 것에 있다'는 주장은 삼성에게도 모욕일 테니 말입니다. 삼성이 혁신적인 기업이란 점은 인정합니다.)


** 이 글이 업무에 도움이 된다면 '자발적 원고료'로 글쓴이를 응원해 주세요. **
(카카오톡 > 더보기 > 결제) 클릭 후, 아래 QR코드 스캔



혹은 카카오뱅크 3333-01-6159433(예금주: 유정식)

Comments

  1. Favicon of http://www.heybears.com BlogIcon 엉뚱이 2009.10.13 17:29

    글을 읽으면서 생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민감한 사항을 건드리시나 싶었는데... 역시 문제해결사 답게 마무리하시는군요. ^^

    perm. |  mod/del. |  reply.
    • Favicon of https://infuture.kr BlogIcon 유정식 2009.10.13 22:44 신고

      하하, 생계는 걱정 안 합니다. 삼성 사람들도 그 교수의 글을 보면 저처럼 비판하리라 생각합니다. ^^

  2. Favicon of http://realfactory.net BlogIcon 이승환 2009.10.13 17:47

    웬지 스물일곱 이건희처럼... 이라는 책이 생각나는군요=_=;

    perm. |  mod/del. |  reply.
  3. Favicon of http://inuit.co.kr BlogIcon inuit 2009.10.13 22:01

    대체 뭐하는 사람인데 농담을 저리 진지하게 썼을까요 -_-
    차라리 혈액형을 이야기하는게 더 와닿겠습니다.

    perm. |  mod/del. |  reply.
    • Favicon of https://infuture.kr BlogIcon 유정식 2009.10.13 22:50 신고

      '곡학아세'라는 말이 순간적으로 떠오르더군요. -_-; 사실 옛날엔 형제가 여럿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형제 중 장남은 1명인데 반해서 차남 이하는 여러 명입니다. 혁신적인 사람 중에 차남 이하인 사람이 많은 이유는 단순하게 '차남 이하'의 pool이 크기 때문은 아닐까 의심해 봅니다.

  4. Favicon of http://www.heybears.com BlogIcon 엉뚱이 2009.10.14 08:53

    생각해 보니, 성장환경이나 성장부담으로 봤을 때 장남은 혁신적이기 어려운 태생적인 한계가 있는 듯 합니다. 부모님의 성원에 힘입어야 한다는, 동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 때문에 혁신적인 활동을 주저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이런 면에서 봤을 때 장남인데도 혁신적이라면 정말 난 분인거고요. 물론 장남도 장남 나름이고, 장남에게 기대하는 사회적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 장남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가... 잠시 생각해 봤더랬습니다.
    그나저나 생계걱정이 없으시다니... 부럽습니다. ^^

    perm. |  mod/del. |  reply.
    • Favicon of https://infuture.kr BlogIcon 유정식 2009.10.15 09:47 신고

      걱정이 없는 건 아니지만 걱정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서요. ^^ 말씀하신 대로 장남에게는 그러한 사회적 책임이 주어지는 게 현실이죠. 하지만,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어요. ^^

  5. Favicon of http://brandon419.tistory.com BlogIcon brandon 2009.10.15 04:13

    어떤 잡지인지 갑자기 궁금해 지네요. 데스크가 내용도 안 읽고 글을 실을리는 없을텐데, 저런 글도 실리는 잡지도 있군요. 개인 블로그에도 저런 허접한 논리를 쓰면 얻어맞는 시댄데...

    perm. |  mod/del. |  reply.
    • Favicon of https://infuture.kr BlogIcon 유정식 2009.10.15 09:50 신고

      이름만 대면 아는 조직에서 나온 잡지입니다. ^^ 칼럼 첫머리부터 그런 결론을 내리는 걸 보고 혀를 내둘렀습니다. 애석한 일입니다.

  6. Favicon of http://esheep.net BlogIcon guybrush 2009.10.15 07:32

    그 분은 어떻게 교수가 되었을까요? -_-;

    perm. |  mod/del. |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