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혁신은 3남에게 승계했기 때문?   

2009. 10. 13.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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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 잡지를 읽다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어 이 글을 씁니다. 모 교수가 '삼성이 타 그룹에 비해 유난히 혁신적인 이유'라는 타이틀로 어느 잡지에 기고한 칼럼 때문입니다. 그 칼럼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3남이 기업을 승계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이게 무슨 말일까?' 저는 그 다음에 어떤 말들이 이어질지 궁금했습니다. 그 교수는 여러 가지 예를 들면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더군요. 조선시대 때 업적이 뛰어난 임금들(태조,태종,세종,세조,성종 등) 중에는 장남이 없다는 걸 언급합니다. 그 다음엔 프랭크 설로웨이의 '타고난 반항아(Born to Rebel)'에서 인용한 듯한 사례들을 나열하더군요. 

그 교수는 프랭크 설로웨이가 "장남은 보수적이고 차남은 혁신적이라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내용을 학설로 정립했다"라고 단언합니다. 차남들이 가진 콤플렉스가 긍정적으로 발현되어 혁신적인 사고와 행동으로 이끈다는 이야기죠.

그 교수는 이렇게 칼럼을 마무리를 짓습니다. "그래서 기업의 승계에서 보수(保守)를 원한다면 장남을 택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차남 이하를 택하라고 권고하는 것이다" 그 교수의 글을 읽고 한동안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첫째,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혼동했기 때문입니다. 혁신적인 사람과 태어난 순서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프랭크 설로웨이의 연구 결과를 '차남 이하에게 승계해야 혁신적이 된다'라는 식으로 오해하도록 만드니 말입니다. 

둘째,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오류'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 교수가 자신의 칼럼에서도 언급했듯이 위대한 과학자인 뉴턴, 라부아지에, 아인슈타인은 장남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대체적으로 급진적인 이론에 대한 반대자는 장남이었다"라면서 '차남은 곧 혁신'이라는 논지를 폅니다. 장남이었던 뉴턴, 라부아지에, 아인슈타인은 그저 예외적인 현상이라는 논조가 밑바탕에 깔려 있더군요.

셋째, 극단적인 환원주의적 시각 때문입니다. 혁신의 원동력은 기업마다 매우 다채롭습니다. 그래서 혁신의 비밀을 한 두 가지의 요소로 축약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몸을 이루는 성분이 대부분 단백질이라고 해서 '인간은 곧 단백질'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차남에게 기업을 승계한 것'이 혁신의 유일한 조건인 양 쓴 글은 공학을 전공하는 교수가 썼다고 믿겨지지 않습니다.

넷째, '도대체 뭘 어쩌라구(so what)?'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장남이 승계한 기업의 경영자가 이 글을 본다면 어떻게 느낄까요? "혁신하려면, 그래, 장남인 내가 차남으로 변신하란 말인가?"라며 (저처럼) 잡지를 쓰레기통에 집어 넣을지도 모릅니다. 혁신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지 않은 채 "장남이 승계한 기업은 알 바 아니야"라는 느낌을 주는 글은 독자의 조소만 일으킬 뿐입니다.

애초에 잡지를 읽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 교수가 저에게 일으킨 '조용한 분노' 덕에 할일을 못하고 오후 시간이 허무하게 흘렀군요. '나쁜 글'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비생산적으로 만들고 우울하게 만듭니다.


(추신 : 이 글은 삼성을 비난하기 위한 글이 아니니 오해 말기 바랍니다. 삼성의 혁신이 '3남이 기업을 승계한 것에 있다'는 주장은 삼성에게도 모욕일 테니 말입니다. 삼성이 혁신적인 기업이란 점은 인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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