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달린다   

2008. 2. 12.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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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3달째다. 내가 밤마다 운동을 시작한지 벌써 그렇게 됐다. 하루가 다르게 몸이 붓더니 어느새 내 정신까지 조여 오는 듯 했다. 무조건 뛰어야 했다. 일이 아무리 늦게 끝나더라고 해야만 한다는 채무감이 전율처럼 온몸을 휘감아더랬다.

일을 마치고 9시쯤 집으로 돌아와, 하루 종일 내 목을 조이던 타이를 풀어 던지고, 셔츠도 벗어 세탁기에 쑤셔 넣는다. 잠시 긴 한숨. 낮 동안 사람의 기척이 없던 집은 내가 만들어 내는 단조롭고 간헐적인 소음으로 내내 갇혀 있던 창백한 공기를 걷어 낸다.

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하얀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한참을 걸려 조깅화를 겨우 신는다. 끈을 너무 세게 조여 놓아서 신기가 어렵다. 조깅화 신는 것이 우리가 사랑하고 헤어지고 또 다른 사람과 만나는 일과 비슷하단 생각에 덧없이 웃어본다.

사랑할 때는 그 사람이 못 가게 꽉 조여 놓아 상대를 숨 막히게 만들어 결국은 떠나게 하고, 다른 이가 나의 마음에 들어오려 하면, 이미 옛 상대에게 맞춰진 마음의 프레임 때문에 받아들이지 주저하고... 그래서 주인을 잃고 버려진 운동화는 슬퍼 보이겠지. 덧없이 짧은 생각을 해본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홀을 지나쳐 8층에서 1층까지 준비운동 하듯 계단을 내려간다. 꺼져있던 계단등이 내가 내려가는 타이밍에 맞춰 하나 둘씩 켜진다. 착착 켜지는 리듬이 마치 연도에 늘어선 응원군이 보내는 박수소리 같다.


집 쪽에는 야산이 낮게 자리 잡고, 그 아래로는 작은 근린공원이 있다. 일단 공원까지 뛰기로 한다. 적응 안 된 다리가 잠깐 머뭇거리지만, 이내 아스팔트를 한 뜀 한 뜀 뛰면서 숨을 고른다. 공원까지는 약 500 미터 정도.

공원 안에는 나트륨등이 군데군데 켜져 있고, 다른 곳보다 섭씨 1도 정도 낮은 공기가 늘 머문다. 야산에서 불어오는 나무들의 비린 냄새도 난다. 공원 한바퀴를 돌고 나와, 이제는 저 멀리 1킬로 전방에 있는 교회 탑을 돌아오는 왕복코스로 접어든다. 비교적 평지라서 속도를 내기에는 좋은 코스다. 길 왼쪽으로는 단조로운 아파트 단지들이 줄지어 있지만, 오른 쪽으로는 다양한 건물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어두운 운동장을 가진 초등학교가 하나 있고, 항상 불이 밝은 국제청소년문화센터가 있고, 다음엔 한옥 풍으로 지어진 'OO가든'이 하루 종일 고기 굽는 냄새를 뿜는다. 옆으로는 일반 주택 10가구 정도가 낮은 어깨를 나란히 붙이고 서있다.

내가 그 집들 중 하나를 지날 때마다 꼭 짖어대는 개가 있다.  이 녀석이 이제 내 냄새를 알아차릴 때가 됐는데, 뭐가 불만인지 항상 시끄럽게 짖어대곤 한다. 헌데, 이 녀석이 오늘은 내가 지나가지도 전에 '오호어우어허~' 예전과는 다르게 짖어대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조금 떨어진 어느 집쪽에서도 '어흥커우강후~'  라고 짖는 소리가 들린다. 몇 번이고 두 녀석 간에 그와 같은 '짖음'의 교환이 계속된다.

두 녀석은 대화를 하고 있는 듯하다. 무슨 말을 저렇게 나누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왠지 모르게 두 녀석 간의 '짖음'에는 안타까운 감정 같은 것이 저며 있는 듯하다.  마치 연인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개들은 솔직하다.  이렇게 늦은 밤, 저리도 안타까운 울부짖음으로 그립다고, 보고 싶다고 드러 내놓을 수 있을 만큼 삶에 솔직하다.  누가 뭐라던 자기의 감정에 충실하기 때문이겠지.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것을 계산하는데 길들여진 탓인지 사랑할 때도 금전출납부를 쓰듯 수입과 지출을 따지는 경우가 잦다. 원시의 땅을 벗어나, 칼을 얻고, 차를 타면서부터 사랑마저도 인간의 돈벌이 수단이 된 건 아닐까? 개에게도 배울 게 있으니, 만물이 나의 스승이다.

교회 탑을 크게 돌아 다시 공원으로 향한다. 이제 제법 셔츠에 땀이 밴다. 골인 지점인 공원 입구까지 이제 500 여 미터. 이 구간이 가장 힘들다. 42.195킬로미터를 쉬지 않고 달려온 그리스 병사처럼 3미터, 2미터, 1미터, 드디어 골인!  숨이 턱까지 차온다. 얼굴이며, 등이며, 팔뚝이며 땀으로 범벅이 된다. 기분 좋은 땀 냄새가 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2리터짜리 생수 한 병을 산다. 그리고 비디오 가게에 들어가, 볼만한 비디오 하나를 빌린다. 다시 계단을 타고 오른다. 내려가는 건 쉬운데, 오르는 것은 항상 힘이 드는 일이다. 지구의 중력이 만들어 낸 현상 때문일 텐데, 성공하는 것은 힘들지만 추락하는 것은 한순간이다, 란 말도 어쩌면 지구의 중력 현상으로 인해 우리의 생활태와 인식태가 규격화된 단면일지도 모른다.

땀에 젖은 속옷을 다 벗어, 아까 그 세탁기 속에 던져 넣는다. 더러운 것을 받아들이고, 깨끗한 것을 내어 놓는 착한 기계다. 물을 틀어 몸 위에 끼얹는다. 찝찌름한 땀 맛이 조금 느껴진다. 이렇게 땀을 흠뻑 흘린 후에 끼얹는 물은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성수(聖水)다. 기독교를 믿진 않지만, 세례자 요한이 예수의 머리에 뿌린 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안락하고 따뜻한 느낌이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조금 더 뛰었다. 생각이 어지러울 땐 그 생각이 맑아지도록 더욱 많이 뛰는 걸 규칙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좀더 깊은 잠에 빠질 수 있겠다 싶다. 좀더 깊이 잠이 들어, 그 어지러운 생각도 빨리 잊혀지겠다 싶다.

밤마다 운동을 하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많은 것을 얻는다. 몸무게를 줄이고, 땀으로 스트레스를 풀어 버리는 피지컬(physical)한 효과는 물론, 한뜀한뜀 뛰면서 내가 내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 스스로를 용서하고, 스스로를 훈계하는 그런 소중한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먼저 나와 친해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이제 자야겠다. 오늘도 꽤 피로한 하루였다. 참! 두 마리 개의 애틋한 로맨스여, 영원하기를 바란다. Good Night !

(벌써 11 년 전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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