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ism 5] Murder   

2008. 1. 15.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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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이 프로라 들었소."

"그렇습니다만, 의뢰를 하시려고 합니까?"

"그렇소. 당신이 늘 하듯 그렇게 처리해주면 되는 거요."

"그렇다면 설명이 좀 필요한데요?"

"물론이오. 당신이 그놈에 대해 알아야 하니까. 인상착의뿐만 아니라 그놈의 버릇이라던가, 자주 가는 술집이라던가, 어떤 향수를 좋아한다든가, 어떤 타입의 여자를 선호한다든지, 뭐 그런 것 따위에 대해 조금은 알아 둘 필요가 있을 거라 생각되오."

 "그럼요. 전 연구하기를 좋아하지요. 연구 없는 작업은 저에게 빌어먹을 죄책감을 느끼게 하니까요."

"좋소. '그놈'의 인상은 별로 특징이라는 것을 찾을 수가 없소. 어디에서나 볼 수있는 인상이오. 마치 '그놈'은 전세계의 범용함과 호환성을 대표하는 듯한 그런 얼굴을 지니고 있단 말이오. '그놈'의 하루는 범용한 크림스프로 시작하여 범용한 섹스로 끝나는, 전세계 어느곳에 갖다 놓아도  문화적 이질감 따윈 느끼지 않을 그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소"

"그래서 정말이지 나는 '그놈'을 저주하고 있소. '그놈'이 내눈에 띌 때 마다 나는 '그놈'의 범용한 얼굴에 기관총을 갈겨대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느라  여간 힘이 든게 아니오. '그놈'에 대한 나머지 것들은 내가 보낸 봉투 속에 자세히 들어있소."

"네, 알겠습니다. 손님의 의뢰를 수행하게 되어 기쁘군요. 원하시는 처리 일자를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그놈'과 내일 오후 7시 정각 OO 지하철역 플랫폼에서 만나기로 했소.
겉으로는 우리는 친구 사이오. 애석한 일이지만 '그놈'은 날 좋아하는 것 같소.
내가 만나자고 하면 언제든지 '그놈'은 예의 범용한 얼굴 가득 범용한 웃음을 띠고, 매일 입고 다니는 감색 재킷에 하얀 티셔츠와 베이지색 면바지, 그리고 랜드로바를 신고 나타날 것이오. 처음 보는 사람도 '그놈'을 찾아낼 수 있을 거요. 그만큼 '그놈'은 범용하오."

"'그놈'은 시간에 늦는 법도 없소. 정확히 7시 정각에 개찰구에 나타날 것이오.
나는 1분 늦게 장소에 나갈 거요. 당신의 작업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요."

"좋습니다. 그정도면 작업을 위한 사전정보는 충분하군요. 수수료로 1억원을 입금하십시오. "
     
"알겠소. 1시간 후에 계좌를 확인하시오. 그럼, 수고하시오."

나는 전화를 끊고 담배를 피우고, 설탕 하나에 크림 두 스푼의 인스턴트 커피를 마시고, 소파 위에 누웠다. 그리고 10분 정도 울었다. 옷장에서  감색 재킷과 베이지색 면바지를 꺼냈다. 범용한 세제 냄새가 났다.

나는 내일 감색 재킷과 베이지색 면바지에 밤색 랜드로바를 신고서 정각 7시에 지하철 플랫폼으로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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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ism 4] Salad   

2008. 1. 15.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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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탁 위에 오른 샐러드가 슬프게 울고 있다.

    내가 건조하게 묻는다.

        "왜 그래?"

    간신히 울음을 멈춘 샐러드가 말한다.

        "난 곧 샐러드로서의 품위와 샐러드로서의 외모를 잃게 될꺼야."

    맞아. 운명은 샐러드에게도 가혹하지.

    게다가 운명은 우리가 도저히 어쪌 수 없을 마지막 순간에

    검은 얼굴을 스윽~ 드러낸다.

    반짝반짝거리는 그린하우스 안에서 생장점에 힘을 모으고 하늘을 향하여 손을 뻗을 때에는

    지금의 운명을 미리 알아챌 수 없는 것이다. 각자의 이름이 있을터인데

    샐러드라는 총칭으로 뭉뚱그러져 이름마저 잃어 버리는 것이다.
 
    가여운 샐러드. 그리고, 삶이라는 깊은 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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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ism 3] Cream Soup   

2008. 1. 15.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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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스프 만드는 법 5단계


    1단계. 오늘 아침의 희망은 어제 아침의 희망보다 한 스푼만큼 줄어들고,
          또한 그와 헤어진지 하루가 더 늘어나고,
          시한부 삶 같이 입 안 가득 까끌까끌하게 떠도는
          20대의 빌어먹을 아침이란 생각 2스푼을 1리터들이 냄비에 털어 넣는다.

    2단계. 어젯밤 꿈 속에 스쳐간 누군가의 향기 1스푼과
          새벽녘 내 창을 지나다가 그대로 고인,
          푸르스름한 어둠 반 컵을 넣고,
          베토벤 소나타 7번같은 리듬으로 푸른 불꽃을 켠다.

    3단계. 서서히 뜨거워지면서 거품처럼 일어나는 그리움을
          무감각한 알루미늄 주걱으로 무료하게 걷어내고,
          혼잣말로, 이제 잊어버릴때도 됐잖아, 이제 그만 잊으라구, 되뇌이며
          냄비 바닥에 눌어 붙을 고독을 또한 무료하게 저어낸다.

    4단계. 불꽃을 쌀 한톨 크기만큼 줄인다.
          우리 함께 했던 담담한 과거같이
          스프 표면에서 이따금씩 톡톡 터지는 기포를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그래도 희망이란 좋은 거야, 라고 또한 되새기며
          어느새 창을 붉게 물들이는 햇살 3스푼과
          올리브유 한 방울을 살짝 떨어뜨린다.

    5단계. 하얀 식탁보를 깔고 하얗게 반짝반짝 빛나는 접시에 스프를 붓는다.
          속이 깊은 스푼을 그 옆에 놓은 후,
          로스토로비치의 무반주 첼로곡을 낮게 틀고,
          항상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양으로 서 있는 후추병을 만져 준다.
          그 후추병이 체온에 의해 체온과 같은 온도로 따뜻해지면
          오늘 아침의 크림스프는 조용하고 키작은 여자아이처럼
          수줍은 김을 내며 내 앞에 손을 모으고 그렇게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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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 15.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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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아파트 단지 내의 작은 공원에 앉아 나는 맥주를 마시지. 밤 10시의 부드러운 어둠은 맥주 속에 섞여들어 나는 그것도 함께 마시지.
 
이런 상상을 해볼까? 여기서 100미터쯤 떨어진 아파트에는 어느 병약한 소녀가 살고 있어.
소녀는 병이 심해져서 학교를 쉬고 있는 중이야. 그래서 항상 방에만 갇혀 지내지. 외로움은 어느새 그녀의 친구가 되어 버리지. 

소녀의 창은 하얀 커튼이 항상 드리워져 있고, 바람이 이따금 커튼을 흔들 때면, 밤하늘 한 조각이 비껴 보이지. 그리고 책상 옆에 세워 둔 까만 케이스 속에는 소녀의 외로움과 공명하는 잉글리쉬 호른이 들어있지.

소녀는 은빛이 도는 까만 머리칼을 손으로 잠시 쓸어 내리다가 생각난 듯 케이스를 열어 잉글리쉬 호른을 꺼내는 거야. 그리곤 입술을 리드에 잠깐 대 보았다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운지법을 기억해 내려고 미간을 좁히지.

그때, "안녕, 운지법 따위는 필요 없어. 너의 숨결로 나를 따뜻하게 해주면 돼." 하며 잉글리쉬 호른은 말하지. 소녀는 그 말에 자신감을 얻게 돼.

가느다란 손가락을 움직여 예전에 어느 FM방송에서 들었던 녹턴을 연주하는 거야. 눈을 감고, 아주 천천히... 속눈썹 아래로 드리워진 그늘이 떨리고 머리카락은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하늘하늘거리지. 잉글리쉬 호른의 음표는 방안 가득한 어둠을 1밀리 1밀리씩 천천히 밀어내며 방 안 전체에 고였다가 어느새 창틈으로 새어 나가지.

그리하여 나는 여기서 그 소리를 듣게 되는 거야. 그 음율 속에서 소녀의 외로움과 심약함과 그리움을 느끼게 되는 거야. 그래, 공명이란 거지, 그건. 소녀도 나도 외로운 시간을 살아왔고, 그리운 시간을 향하여 살게 될 테지. 소녀도 나도 쓸쓸한 사랑을 했던 적이 있었고, 다가오는 사랑을 어쩔 줄 모르는 거지니까.
 
잉글리쉬 호른의 음표는 내 발 아래 쌓여 가지. 어둠은 깊어만 가고, 소녀도 나도 어느새 지쳐가지. 5밀리쯤 남은 맥주처럼 누군가가 채워 주길 기다리는 모습으로 공원 벤치에 앉아 소녀와 잉글리쉬 호른를 상상하며 나는 한껏 그리워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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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ism 1] Room Mate   

2008. 1. 15.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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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메이트 모집공고를 낸지 정확히 29분이 지난 무렵, 누군가 내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룸메이트가 필요하시다면서요? 제가 해드리겠어요."

난 놀란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여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로 내 앞에 서있었다.

"당신, 놀랐군요? 그럴 만 하겠지요. 그렇지만 당신이 낸 공고 어디에도 룸메이트가 알몸이어서는 안 된다라는 언급은 없었어요."

"물론 그래. 당신의 몸은 정말 훌륭해. 하지만 일반론적인 룸메이트의 세계에서 당신을 이해하기란 무리야."

"호호, 그렇군요. 나는 당신의 그런 점이 맘에 들어요. 이봐요. 우선 안에 들어가도 될까요? 다른 사람이 보면.... 암튼 나에게도 수치심이란 게 있으니까요."

그녀는 침대에 털썩 앉더니 어디에선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알몸인 그녀의 어느곳에 담배 따위를 휴대할 수 있는지 난 잠시 궁금했다.

"어젯밤의 전화를 기억하시죠? 당신에게 10분만 나와 통화하자는 제의를 했었죠. 그 사람이 바로 나랍니다."

그래, 나는 어젯밤 펄벅의 '대지'를 읽으며 칭따오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같이 지내던 룸메이트가 사명감 어린 눈빛을 남기고 남극으로 떠나버린 후의 적적함을 달래고 있을 때 날카롭게 울린 전화. 그 시간에 날 찾는 전화는 내가 이 방에 산 이래로 단 한 번도 없었다. 대부분 룸메이트의 여자들이 룸메이트를 간절히 찾는 그런 류의 전화 밖에는 없었다. 처음엔 룸메이트의 여자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었다. 그녀는 이렇게 첫마디를 내뱉었다.

"저와 10분간만 이야기하시겠어요?"

"룸메이트를 찾아? 그는 이미 떠났어. 사명감에 젖은 눈빛을 하고 말이야."

"알아요. 전 당신의 룸메이트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원하는 건 바로 당신과 10분간 이야기 하는 것일 뿐이죠."

"그런데 왜 꼭 10분 간이지? 거기엔 무슨 메타포라도 있나?"

"이봐요. 난 시간이 없어요. 그런 걸 일일이 설명하기엔 10분은 너무 짧아요. 나와 이야기하시겠어요?"

"좋아. 그럼 어서 말해보라구."

"난 지금 막 당신꿈을 꿨어요. 무슨 꿈인지 궁금하지 않아요? "

그녀는 꿈 이야기를 시작했다. 난 술에 취해 건성으로 들었다. 누구누구와 어디를 갔는데 거기가 녹색인간의 무리들을 만나서 그 부족의 추장과 결혼했는데, 그가 바로 나라는 것. 그리고 아기를 낳았는데 그 아기의 피부가 온통 녹색이었다는, 싸구려 SF 소설같은 이야기 였다. 10분간 혼자서 지껄이던 그녀는 정확히 10분이 되자, 아무 말없이 딸깍 전화를 끊어 버렸었다.

"당신이 뭐라든 난 여기에 살겠어요."

마치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는 듯 그녀의 표정은 비장함, 그 자체였다. 그 눈빛은 나를 압도해버렸다. 그녀를 나의 룸메이트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종의 책임감 같은 것이 뼈속을 파고 들어왔다. 그래서 난 허락하고 말았다. 물론 그녀의 훌륭한 몸이 마음에 들기도 했다.그래서, 지금 나는 새로운 룸메이트와 함께 산다. 그녀는 매일밤 어디론가로 전화를 한다.

"저와 10분간만 이야기해요."

언제나 그렇게 시작되는 전화는 녹색 피부의 아기로 끝을 맺는다. 전화를 끝내고 알몸인 상태로 어디론가 외출한다. 그리곤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푹 꺼진 눈을 하고 들어와 내 곁에 눕는다.

"안아줘요, 꼭"

내품을 파고드는 그녀의 흰 살갗은 온통 상처투성이다. 그녀가 무엇을 하고 돌아다니는지 나는 모른다. 알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녀에게도 사생활이란 게 있는 것이다. 그녀가 외출을 하고 나면 난 침대에 누워 그녀를 생각한다. 어느 지하도시의 한구석에 거주하고 있는 녹색인간을 상상하기도 한다. 아마 그녀는 그들을 만나고 있으리라고, 나는 귀찮아서 그렇게 생각해 버리기로 한다.

세상에는 이렇게 이상한 룸메이트를 가진, 나 같은 사람도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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